의전 강국 코리아의 그늘
서울에 있는 중견 A그룹에 다니는 이철현(38·가명) 과장은 회사 로비에서 계열사 대표 B씨가 닫힌 엘리베이터에 대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B대표는 회장이 출근할 때 빌딩 앞에서 기다리다 자동차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까지 모신다. B대표는 회장이 엘리베이터에 탈 때 90도로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서도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다. 이 씨는 “B대표는 회장이 고층까지 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에도 허리를 펴지 않는 것 같다”며 “그런 B대표를 보고 직원들은 킥킥 웃지만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전을 잘해야 성공한다고 느끼기도 한다”고 입맛을 다셨다.
의전은 사전적으론 행사를 치르는 법식을 뜻한다. 국가 간의 공식적인 의례에서 통용되는 예법, 또 개인 간의 사회적 예의인 에티켓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명박 정부 때 청와대에서 대통령 의전관을 맡았던 『대통령을 완성하는 사람』의 저자 이강래 연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는 “의전은 상대에 대한 배려다. 인간관계 혹은 국가의 관계 등을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장관이 감히 말대꾸’ 의전의식 탓 #자신과 다른 의견 말하면 레이저 #기업서도 비서들이 인의 장막 치고 #의전 구실로 소통 차단 비일비재 #프로골프 대회 주인공은 회사 VIP #국감 땐 피감기관서 특별한 의전 #높은 사람 의전 중시하다 본말전도 #일방통행 아닌 소통·협치로 변해야
그러나 한국에서 의전은 ‘윗사람에 대한 예우’의 뜻으로 변질되고 있다. 관(官)과 민간기업 모두 윗사람을 잘 모시는 의전이 중시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의전 강국이다. 한국 최고 기업인 삼성그룹도 ‘의전의 삼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의전이 과잉충성, 혹은 아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명예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해외 근무를 했던 삼성그룹의 한 부장은 “고위직이 해외 법인을 방문할 경우 현지 직원들이 VIP 동선을 짜고 수차례 예행연습을 하는 등 한 달 정도 사실상 업무가 마비된다. 의전에서 실수가 나오면 팀 전체가 인사 조치를 당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의전 탓에 장병들 영하에 야외 수료식
최근에도 과잉 의전 관련 뉴스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난달 24일 충남 논산의 육군훈련소를 방문해 장병 수료식에 참석했다. 평상시 겨울에는 수료식을 실내에서 치렀는데 황 대행이 참석하면서 경호와 의전 문제로 실외로 옮겼다. 이날 기온은 영하 13.5도였다.
지난달 3일에는 황 대행의 자동차 이동로 신호 통제를 통상적인 2분이 아니라 7분 넘게 하면서 시민들을 짜증나게 했다. 이에 앞서 황 대행은 총리이던 지난해 승용차를 타고 KTX 서울역 플랫폼으로 들어가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노인종합복지관을 방문했을 때는 황 대행이 탈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는 바람에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걸어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이강래 교수는 “의전은 행사에서 상대를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관례에 소홀함이 없도록 모시는 것이다. 참석자를 배려함으로써 감동시키고 이를 통해 초청자를 부각시키고 일을 잘 풀리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나 참석자에게 불쾌감을 주는 의전은 실패한 의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높은 사람’ 의전이 중시되기 때문에 정작 본말이 전도되기도 한다. 프로골프대회 운영 대행을 하는 김상영(가명)씨는 “대회 스폰서들은 회사 고위급 인사가 참가하는 프로암대회만 말썽 없이 끝나면 대회가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진짜 대회가 어떻게 되든 별 관심이 없다. 프로골프대회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선수나 관중이 아니라 회사의 VIP”라고 말했다.
“의전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소통”
윗사람이 예우를 받는 것은 미풍양속이다. 그러나 과잉 의전으로 소통을 막고 창의성을 죽이면 폐해가 크다.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의전이 지나치게 되면 한국 사회의 유교 문화 등과 겹쳐 수평적 소통을 방해하고 커뮤니케이션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군대식 상명하복으로 발전하며 결과적으로 조직의 생각하는 능력을 죽이게 된다”고 말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의전 스타일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하룻밤 여행에도 호텔에 침대 매트리스와 샤워꼭지 등을 바꾼다고 보도됐다. 또 객실 화장대에 필요한 조명등과 스크린 형태의 장막 설치를 원해 화제가 됐다.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사생활의 영역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 의전 스타일의 진짜 해악은 장관들이 국무회의 등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받아쓰기로 일관하게 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퇴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비교된다. 부하 직원이 소파에 다리를 뻗고 앉고 자신은 선 채로 대화하는 오바마의 사진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발언이 나오면 레이저빔을 쏜다는 박 대통령과 대조가 됐다. 감히 장관이 대통령에게 말대꾸를 한다는 의전의식이 소통에 커다란 벽을 쌓는 것이다. 이강래 교수는 “의전은 형식이 아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소통”이라고 말했다.
경호업체인 MSAT의 김성철 대표는 “미국에서 의전과 경호는 한국보다 더 중시된다. 모든 상황을 대비한 시나리오를 짜고 13중 경호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전한 영역에서 VIP의 소통을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오바마의 연설문 작가 데이비드 리트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오바마는 개그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부터 떨어지는 지지율까지 자신의 모든 걸 농담 소재로 썼다. ‘공화당은 늘 소수민족에게 손을 내밀어 주자고 한다. 눈앞에 있는 소수민족(오바마)부터 챙길 것이지’라는 등 셀프 디스로 재미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얻은 인기를 통해 정책을 실행할 추진력을 얻었다”고 썼다.
한국 국회의원들은 초선부터 의전을 배운다. 지난해 5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회 사무처가 마련한 초선 의원 의정 연찬회에서 새로 뽑힌 의원들이 초심을 다짐했다. 그날 국회 사무처는 엘리베이터 3대를 잡아놓고 당선자들을 실어 날랐다. 의원들은 300m 거리를 우등버스로 이동했다.
"문고리 권력은 청와대만 있는 게 아냐"
초선 의원들이 스스로 과잉 의전을 만든 건 아니다. 시키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해주는 것이 한국 의전의 특징이다. 지난해 부산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법원 여직원이 국회의원들이 탈 엘리베이터 운행을 위해 대기했다. 엘리베이터 도우미를 연상시킨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감 기간 중 을이 되는 피감기관에서 의원을 위해 특별한 의전을 마련한 것이다. 수자원공사 국정감사 때는 화장실에 의원들 이름표를 붙인 치약·칫솔을 갖다놓은 일도 있다. 기재위 국감장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담은 영상을 반복해 틀었다.
대기업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조호성(가명)씨는 “아랫사람이 알아서 하는 의전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업무 능력보다 윗사람 코드 잘 맞추기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얼마나 납작 엎드리나 경쟁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과잉 의전은 윗사람이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없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의전은 차단의 구실이 되기도 한다. 대기업 임원 이학종(가명)씨는 “외국 기업 CEO들은 본인이 직접 자신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은 비서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들고 인의 장막을 친다. 일부 직원은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혹은 신임을 얻기 위해 의전을 구실로 소통을 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회사의 소통 구조가 막힌다. 이른바 문고리 권력은 청와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강래 교수는 “의전도 시대 흐름에 따라 일방통행이 아니라 소통과 협치로 변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의전 관행을 고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아들 김동선씨의 술집 폭행 사건은 과잉 의전에 익숙해진 인물의 행동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한화그룹은 경호와 의전이 다른 회사보다 강한 조직으로 꼽힌다.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과잉 의전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세월호 침몰 당시 중앙부처 공무원에 대한 과잉 의전 때문에 해양경찰의 초기 구조활동이 방해를 받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 대통령 측은 “사고 당일 중앙대책본부 방문이 늦은 이유는 경호상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을 ‘세월호 7시간’의 늪으로 끌고 간 주범은 과잉 의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해외 과잉 의전 사례
이집트 대통령 행차에 레드카펫 4㎞ 깔아 국민들 분노 불러
해외에서도 과잉 의전 사례가 종종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지난해 중국 쓰촨성 청두의 정육점을 방문한 리커창 총리는 주인에게 장사가 잘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당신 의전 때문에 손님들이 못 들어와 하나도 못 팔았다”고 했다. 리 총리가 “그럼 내가 사겠다”고 했는데 주인이 “경호원들이 (안전을 이유로) 고기 자를 칼까지 다 걷어 가 팔 수 없다”고 답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다.
이집트 군부는 지난해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행차를 위해 약 4㎞에 달하는 레드카펫을 깔아 국민의 분노를 샀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성지순례(하지) 도중 700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이란은 “살만 사우디 국왕 아들을 위해 성지순례객 이용 도로를 폐쇄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다”고 비난했다. 이런 과잉 의전이 벌어진 곳은 아직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가 대부분이다.
역사상 최고의 의전으로는 1971년 5일간 진행된 이란의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 연회가 꼽힌다. 이벤트 기획에 10년이 걸렸다. 연회장인 페르세폴리스로 가는 고속도로를 새로 깔았고 메르세데스벤츠 리무진 차량 250대가 의전차량으로 동원됐다. 카스피해산 캐비아, 구운 공작 등 희귀한 음식 등을 프랑스 요리사들을 불러 준비했다. VIP를 모실 직원들의 유니폼은 역시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랑방이 맡았다.
팔레비 왕실 가족 60명과 덴마크·요르단·노르웨이·영국 등의 왕족,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이탈리아 에밀리오 콜롬보 총리 등 각국 정상들이 참가해 1959년산 동페리뇽 로제 와인으로 축배를 했다. 그러나 이런 초호화 의전을 치른 팔레비 왕조의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는 79년 시민혁명으로 쫓겨났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