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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있는 마지막 길, 죽음도 셀프 디자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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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01면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1년 앞으로,
한국인 18명 스위스에 안락사 신청

지난해 봄 벚꽃이 피어나기 시작할 무렵 말기 췌장암으로 입원 치료를 받던 김창호(가명·당시 45)씨는 “퇴원해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의료진은 고개를 저었다. 치료를 중단하면 패혈증이 일어나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어서였다. 김씨는 며칠이 지난 후 “스무 살, 다섯 살 된 두 아들과 어린이날 캠핑하러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나가야 한다”고 다시 간청했다.

마지막 권리 죽는 방법 선택 #안락사·조력자살 찬반 논란 #“연명 환자·가족 고통은 지옥”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려워” #준비 미비로 법 시행 혼란 예고

절충안으로 김씨는 집 대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고, 사흘 후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대공원으로 잠시나마 소풍을 가기로 했다. 그러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김씨는 “소풍도 못 간다면 늦둥이에게 레고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럴 시간도 부족했다. 아이가 오기 직전 김씨는 숨을 거뒀다. 선물은 호스피스의 수녀가 대신 아이에게 건네줘야 했다. 아이는 “아빠, 선물 잊지 않으셨네요”라면서 아직 온기가 남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 라정란 수녀가 전한 얘기다. 라 수녀는 “어린아이들은 선물에 정신이 팔리는데 이상하게도 아빠의 손을 잡더라. 그러자 고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심장이 멈춘 직후 청각은 잠시 살아 있다는데 표정이 바뀐 것을 보면 마지막 가는 길 아버지와 아들이 영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아쉬움도 있다. 라 수녀는 “연명치료를 일찍 중단하고 호스피스에 왔다면 아이와 함께 캠핑도 다녀올 수 있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과도한 연명치료를 지양하고 가족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들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며 고통 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한 ‘김 할머니 사건’에서 승소한 법무법인 해울의 신현호 변호사는 “노령화로 인해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커졌다. 삶의 정체성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죽기를 바라는 새로운 가치가 생겼다”고 해석했다.

인간의 마지막 권리인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억지로 삶을 연장하는 것은 최대의 모욕”이라고 했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음식도 못 먹고 말도 못한다. 마취를 하고 의식을 잃은 채 알몸을 드러내야 하며 심폐소생술을 하다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중환자실에서 가족과 인사도 못하고 이별하는 경우가 잦다. 김창호씨도 연명치료를 계속했다면 아들과 마지막 교감을 못하고 이별했을 것이다. 라 수녀는 “한 사람의 죽음은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임종 직전 가족과 화해도 이뤄진다. 반대로 무리한 연명치료를 하다가 주위 사람들까지 정신적·육체적·경제적으로 피폐해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201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인의 88.9%는 연명치료를 반대했다.

이 같은 사회적 인식을 반영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의 시행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그러나 법의 미비점이 적지 않다. 서울대병원 공공보건 의료사업단장 윤영호 교수는 “법이 4개 질환으로 국한되어 있고 호스피스 시설 부족으로 혼란도 예상된다”고 말했다. 마지막 가는 길을 정리할 기회를 갖는 공간인 호스피스 시설의 한국 이용률은 13.8%로 영국 95%, 미국 43% 등에 비해 낮다. ‘말기 상태’ 등의 규정도 명확하지 않다.

또 사전의료의향서 접근도 문제, 임상진료지침 만들기, 인프라 구축 미흡, 국립연명의료기관 설치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았다.

의료계 일각에선 “연명의료결정법은 곧 사망할 임종기 환자에게 별 의미 없는 연명의료 거부권을 주면서, 진짜 연명의료 거부가 필요한 말기 환자에게는 연명의료 거부권을 주지 않는다”면서 안락사 등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와 관련, 허핑턴포스트는 최근 “한국인 18명이 스위스 안락사 주선 기관 디그니타스에 회원 신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임종 환자의 호흡기를 떼는 등의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다. 의사로부터 처방받은 약을 본인이 직접 투약하는 조력 자살이다. 조력 자살은 한국 정서와는 먼 얘기라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17명), 태국(10명), 중국(7명)을 제치고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신청한 나라였다.

디그니타스와 인터뷰한 성균관대 의대생 김준규씨는 “희망이 없이 연명하는 환자와 가족의 고통은 지옥과 비슷해 보인다”면서 “꼭 필요한 환자들은 안락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박형욱 단국대 의료윤리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허용되겠지만 정서상 아직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연명의료 중단도 보수적으로 아주 제한된 입법적 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영국 시사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권리가 있다면 남에게 도움받을 수 있는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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