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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경제에 관한 한 휘둘리지 않고 소신 지켰던 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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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고 강봉균 전 재경부 장관 영전에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추모 글

2007년 국회에서 윤증현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오른쪽)과 함께한 강봉균 당시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2007년 국회에서 윤증현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오른쪽)과 함께한 강봉균 당시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강 선배, 아직도 간밤에 들려온 비보가 선뜻 믿기지 않습니다. 지난해 전직 경제수장들의 모임에서 뵈었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까.

외환위기 후 팔걷고 수습 총지휘
2005년 경제부총리 후보 거명 땐
“국가에 마지막 봉사” 진심 느껴

돌이켜보면 강 선배와 저는 인연이 적지 않았습니다. 선배님은 외환위기가 터진 이후인 1999년 재정경제부 장관직에 취임하신 뒤 외환위기 수습 작업을 총지휘했습니다. 그 노력 덕택에 한국은 외환위기의 굴레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인 2009년 기획재정부 장관에 취임해 선배님처럼 위기 극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2005년에는 강 선배와 제가 경제부총리 후보로 나란히 거명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부총리가 되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중량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제안을 고사하고 대신 선배님을 추천했습니다. 그만큼 선배님이 그 자리에 적합한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강 선배께서는 누구보다 한국 경제에 정통했고, 한국 경제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수습 이후 정치권에 진출하신 것도 한국 경제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음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2005년 부총리 후보로 거명되면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왔을 때 선배님은 일일이 응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리에 욕심이 있으면 이런 의혹들에 적극 해명했을 거다. 부총리를 맡게 된다면 국가에 마지막 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것이 선배님의 진심이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님은 그런 분이니까요.

선배님은 경제에 관한 한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을 제대로 지켰던 분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됐을 때 야당이던 민주당은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에 몸담고 계셨던 선배님은 당론과 달리 “소신이 있고 금융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을 발탁한 인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셨습니다. “지난 정권 때 일했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쓰겠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던 당시 발언은 정치보다 경제를 더 중시했던 선배님의 소신과 철학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지난해 총선 당시 선배님의 행보를 좋지 않게 평가했을 때도 저는 선배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당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 경제를 제대로 챙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기 때문입니다.

국가 경제에 대한 선배님의 근심은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던 지난해 11월의 ‘코리안 미러클 4: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 발간보고회에서 선배님은 “과거에는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라고 자처했지만 이제는 ‘코리안 미러클’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가 쑥스러워졌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한국 경제는 수출·투자·소비가 동시에 침체에 빠진 ‘퍼펙트 스톰’ 국면에 놓여있습니다. 더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파격적인 정책들 때문에 나라 안과 밖을 막론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선배님이 국가 원로로서 중심을 잘 잡아주셔야 하는데, 이렇게 떠나시다니 너무나 아쉽습니다. 이제 한국 경제를 챙기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 됐습니다. 그동안의 근심과 걱정, 고통은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영면하십시오.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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