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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향하는 블랙리스트 의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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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수용자 번호가 적힌 배지를 달고 수갑을 찬 채 어제 특검팀에 소환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왕실장’과 ‘신데렐라’로 각각 불리며 권력의 핵심에 있던 두 실세의 추락은 블랙리스트(문화예술인 정부 지원 배제 명단)의 존재와 부도덕성을 확인해준다. 또한 특검 수사가 두 사람의 정점에 있는 박 대통령의 개입과 지시를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 관문 앞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블랙리스트의 진실 규명은 특검 수사의 성패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도 중요한 변수다. 특검 수사의 세 갈래 방향 중 ‘뇌물수수’와 ‘세월호 7시간’의 파괴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가고 있어 특검으로서도 블랙리스트 수사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김기춘·조윤선 구속, ‘윗선’ 규명만 남아
박 대통령 측, “지시 사실 없다” 반격
‘알 권리’ 방해하려는 특검 고소는 잘못

블랙리스트의 윤곽은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구속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법원의 판단은 블랙리스트 생성 과정에 두 사람이 개입 내지 주도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구속영장에 따르면 블랙리스트는 2014년 5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고, 이후 김 전 실장-조윤선 당시 정무수석 라인에서 관리됐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문화예술인의 활동을 억제하고, 반정부 여론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니 권위주의 시절로 되돌아간 참담함을 느낀다.

이제 블랙리스트의 퍼즐은 2%만 남겨놓고 있다. ‘김기춘 설계’와 ‘조윤선 실무’라는 구도를 누가 최종적으로 지시했는지를 푸는 것이다. 두 사람이 블랙리스트 작성과 실행을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윗선’은 단 한 명밖에 없다. 특검이 두 사람을 구속한 직후에도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것은 박 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초읽기에 임박했음을 시사한다.

박 대통령 측의 반격도 거세지는 모양새다. 그렇다고 수사 대상자인 박 대통령이 수사 주체인 특검을 고소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박 대통령 측은 “박 대통령은 블랙리스트 작성을 어느 누구에게도 지시한 사실이 없다”며 “허위 사실을 언론에 넘긴 특검 관계자를 고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내용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허위보도’라며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국민의 알 권리과 언론의 취재·보도 자유를 거론하기에 앞서 황당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수사기관이 내용 일부를 언론에 알리는 것이 ‘기밀누설’이라면 국정 농단 사태와 같은 중차대한 사건의 진행을 국민은 모르고 지내라는 말인가. 각종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부인한 뒤 사실로 드러나면 마지못해 시인하는 그동안의 패턴은 국민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최순실씨에게 넘어간 국가기밀은 애써 외면하면서 수사 기밀 운운하는 태도 자체가 모순이다. 수사에 압박을 가해 무력화시키려는 얄팍한 속셈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블랙리스트 수사를 막겠다고 애써도 블랙리스트 실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