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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부동산에 묶인 자금, 주가연계 증권·물가채에 돌린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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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삼성증권 삼성타운 금융센터의 세미나실. 대학법인·재단 등 비영리 법인의 자금운용 담당자 50여 명이 참석한 ‘공익법인포럼’이 열렸다. 강연자로 나선 정범식 삼성증권 채권상품팀장은 “지난 3년 새 30년·10년·5년 미국 국고채 금리가 한국 금리를 모두 앞지르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하지만 미국이 추가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한다고 해도 한국이 따라서 올리긴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가계부채·저출산 등 한국의 다양한 사회문제로 경기 둔화가 지속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포럼에 참석한 윤송재단의 박달수 팀장은 “재단 자금운용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며 “채권 투자 비중을 줄이기보다 만기까지 보유해 금리에 상관없이 투자 수익률을 높이는 ‘채권 만기매칭’ 투자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중견기업 회삿돈 굴리기 나선 증권사들

#2. 자동차부품기업을 운영하는 박모(56) 대표는 지인의 소개로 한 증권사 금융센터를 방문했다. 상담실에 안내 받은 그는 법인센터장·프라이빗뱅커(PB)·세무사 등 3명의 전문가가 세세하게 법인자금을 분석하고 전략을 제시해주는 시스템에 깜짝 놀랐다. 여유자금으로 1년 만기 정기예금에 넣어뒀던 60억원은 예금이자보다 2~3% 수익을 더 올릴 수 있는 상품을 추천받았다. 30억원은 주가연계형 파생결합사채(ELB) 등 원금보장형 상품에, 나머지 절반은 10년 만기 국고채에 투자했다. 또 자동차부품을 수출하는 기업이다보니 100만달러(약 12억원)를 회사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 상담이 끝난 뒤 달러자산도 외화예금에 환헤지 수익을 더해 수익률을 제공하는 외화정기예금신탁에 가입했다. 박 대표는 “그동안 회삿돈은 필요할 때마다 찾아쓰기 쉽도록 수시입출금 통장에 넣어뒀는데 다양한 상품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며 “앞으로 회사자금의 용도를 보다 명확하게 구분해서 한푼이라도 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들이 법인자금 컨설팅을 받은 곳은 최근 강남권을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는 증권사의 ‘초대형 금융센터’다. 지점 3~4개를 합쳤기 때문에 규모나 인력이 기존 지점의 적어도 3배 이상이다. 전체 면적은 평균적으로 1000㎡(약 300평)에 증권과 은행 창구가 함께있는 복합점포로 고객 상담실, 세미나실, 휴게실 등이 있다. 인력도 100여 명 안팎이다. 특히 본사에만 상주하던 IB(투자은행)전문가를 비롯해 세무사·변호사 등이 머물고 있어 기본적인 자산관리부터 법무·세무·부동산 상담까지 원스톱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게 초대형 지점들의 공통점이다. 증권사들이 앞다퉈 지점 규모를 키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온라인·모바일의 발전으로 지점을 찾는 고객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코스피시장의 주문매체별 주식거래량 비중을 보면 홈트레이딩시스템(HTS)과 스마트폰을 이용한 모바일 거래(MTS)가 80%에 이른다. 이와 달리 영업점을 찾거나 전화로 주문한 오프라인 비중은 14.2%에 불과했다. 따라서 증권사는 수익성이 떨어지는 지점을 합쳐 비용 줄이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NH·삼성·미래에셋대우 등 공격적 확장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수익원으로 떠오르는 중소·중견기업 대상으로 영업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양천우 NH농협금융플러스 삼성동금융센터 총괄 센터장은 “그동안 금융사가 다양한 서비스로 고액자산가 모시기 경쟁을 펼쳤지만 수요엔 한계가 있다”면서 “대기업 위주로 펼쳤던 본사의 법인영업을 지점으로 확대해 중견·중소기업까지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자문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증권사의 초대형 지점들이 기업이 밀집해있는 서울 강남역과 삼성동 일대를 중심으로 들어서는 이유기도 하다. 이달 9일 NH투자증권은 테헤란로WMC, GS타워WMC, 한티역점 등 기존 지점 세 곳을 합쳐 삼성동 파르나스타워에 삼성동금융센터를 열었다. 전체직원은 66명이다. 이중 15%가 법인영업팀 인력이다. 이재호 법인센터장은 “본사에서 투자은행(IB)·채권·퇴직연금 사업을 담당했던 법인영업 전문가들로 팀이 구성돼 자금운용은 기본이고, 기업공개(IPO)·유상증자 등 전문적인 컨설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보다 먼저 강남권에 초대형 지점을 낸 곳은 삼성증권이다. 지난해 말 강남구 도곡동 군인공제회관빌딩에 강남금융센터를, 서초동 삼성생명 건물에 삼성타운 금융센터를 각각 선보였다. 각 센터는 기존 지점이 10여 명의 전문가를 배치했던 것과 달리 최대 100명의 직원이 상주한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초저금리가 지속되면서 법인들이 자금 운용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법인 컨설팅에 공을 들이고 있다”며 “CEO포럼과 리더스클럽 등 삼성증권이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 커뮤니티를 통해서 유입된 자금이 지난해에만 9월말까지 1조5000억원에 달해 1년 새 2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최근 대우증권과 합병을 마무리하고 업계 1위(자기자본 기준)에 오른 미래에셋대우는 더욱 공격적으로 법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기업금융과 자산관리를 접목한 인베스트먼트 웰스매니지먼트 센터(IWC)가 다음달부터 줄줄이 문을 연다. 우선 옛 대우증권 사옥에 IWC가 가장 먼저 개점할 예정이고, 강남(IWC3)과 판교(IWC1) 등 전국적으로 7개 대형지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퇴직연금 업무를 통해서 관계를 맺은 기업에겐 기업공개(IPO), 회사채 발행, 임직원 자산관리까지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이제 법인도 자금운용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범식 팀장은 “법인의 80% 이상이 1년 만기 정기예금으로 자금을 굴리고 있다”며 “요즘처럼 1% 초저금리 시대엔 단순히 금고에 돈을 넣어뒀다가 찾는 수준의 운용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보다 앞서 20년 넘게 장기불황을 겪은 일본 연기금의 포트폴리오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일본 보험사들은 1980년대 고성장시대엔 은행 금리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예대마진(예금과 대출 간의 금리차이)을 노리고 법인자금의 50%를 대출사업에 투자했다. 또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체 자산의 6%는 부동산 시장에 투자했다.

3개월 단위 투자에 원금 보증 조건도

하지만 1990년 거품경제 붕괴 이후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산 포트폴리오가 확 바뀌었다. 저금리로 접어들면서 예대마진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50%에 이르던 대출자금은 2010년 들어 14%로 쪼그라들었다. 대신 채권투자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커졌다. 여유자금을 장기 국공채나 우량 해외채권을 사들이는 투자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또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면서 부동산 투자 비중도 2%로 줄였다. 정 팀장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고 기업이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에 들어선다면 한국도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20년’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법인 자금을 투자성향이나 기간을 감안해 분리 운용해야 한다”며 “장기간 보유하는 자금은 ‘시중금리+알파’ 수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장기 국고채나 물가연동국채(물가채)에 투자하고 단기자금은 실버산업, 신기술 테마 등 신성장 산업에 적극 운용해 수익을 추구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김덕희 NH농협금융플러스 삼성동금융센터 부장은 고액자산가들이 선호하는 메자닌(mezzanine) 투자와 헤지펀드를 추천했다. 메자닌은 건물의 층과 층 사이의 라운지를 뜻하는 이탈리아 용어다. 투자 방식도 주식과 채권의 장점을 겸비한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회사채에 투자한다. 주가가 오를 땐 주식으로 전환해 수익을 챙기고, 주가가가 하락할 땐 채권 이자를 받는다. 대부분의 자산가는 사모펀드나 일임형 랩 방식으로 투자한다. 김 부장은 “주식·채권·파생상품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해 국내외 시장과 상관없이 연 5~7%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도 매력적인 투자처”라며 “헤지펀드 운용사 중에서도 꾸준하게 이익을 올리는 운용사를 선별해 자금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증권사마다 법인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을 내놓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곳이 미래에셋대우다. 김경식 미래에셋대우 상품개발팀장은 “아직까지 상당수 법인은 급하게 목돈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간 운용하는 데 불안감이 많다”며 “한국 법인의 특성을 고려해 투자 기간을 줄이고 은행 예금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여수 광양만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이 사업의 성과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전자단기사채(전단채)를 발행한 것이다. 전단채는 전자 방식으로 발행하는 1년 미만의 단기채권이다. 3개월간 2% 수익률을 돌려주는 구조다. 특히 이 부동산 사업에 문제가 생길 경우 미래에셋대우가 3개월 뒤 전단채를 도로 사들인다는 신용보증 단서까지 붙었다. 상품이 선보인 지 단 이틀만에 1000억원이 팔렸다. 이중 절반이 법인 자금이다. NH투자증권은 농협 금융사 특성을 살려 법인 대상으로 지역농협의 금리 우대 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1년 만기 예금의 금리는 1.9%로 은행 예금에 비해 0.7~0.8%포인트나 높아 법인 고객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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