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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더불어 잘 사는 공동체 개념인 공화주의를 몰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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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12면


강태진(65·사진) 서울대 공과대학 재료공학부 교수는 에너지가 넘친다. 미국 학회에 갔다가 20일 새벽 인천공항에 내렸는데 자택에 들러 짐을 풀고 곧바로 눈 쌓인 서울대 관악캠퍼스로 출근했다. 시차 적응할 겨를도 없이 한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강 교수는 지난 9일 『코리아 아젠다 2017』(나녹)을 출간했다. 서울대 교수 20인의 집단지성을 통해 대한민국의 절박한 문제를 풀어 보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 강 교수는 “지난해 9월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조금 더 관심을 받게 됐다”며 “일자리 창출부터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해 보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냈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우수논문상을 두 차례 받는 등 공학자로서 연구 업적이 크다. 그러나 그만큼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강 교수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결된다. 공학도 정치·경제·사회 전반과 연결돼 있다. 공학도 인본주의를 따르고 사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기술이 사람들의 생각을 구성하는 원천이라고 강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예전엔 차분하고 느린 발라드가, 요즘엔 빠른 댄스음악이 많다. 사람들이 갑자기 댄스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아니다. 컬러TV가 나온 후 무대가 화려해졌다. 그 무대를 채울 수 있는 춤이, 그 춤을 따라갈 빠른 음악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의 취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나 본성이 아니라 외부적인 조건, 바로 기술 발전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걸어 다니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는 사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한다. 차를 타면 더 멀리 갈 수 있지만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펼쳐진 공간을 제대로 보지 못해 도보여행이 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이 축소된다”고 말했다.


최근 인류는 4차 산업혁명 앞에 섰다. 또 다른 커다란 변화가 예상된다. 강 교수는 “스마트폰이 홍콩 민주화 시위, 한국의 촛불 시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디지털 소통수단의 발달로 많은 사람이 하나의 가치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됐다. 반면 스마트폰 때문에 중우정치나 대중의 인기와 영합한 포퓰리즘이 판을 치기도 한다. 가짜 뉴스(fake news)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대량 유포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집단지성이 답이 될 수 있다고 강 교수는 봤다. 그는 2010년부터 ‘10년 후 한국의 미래’라는 주제로 다양한 전공의 서울대 교수들과 매달 정책포럼을 열었다. 이번에 나온 책도 그 결실 중 하나다. 강 교수는 “현대는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가치와 사회적 함의가 형성된다. 자기와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 함께 뜻을 모아야 더 바르게, 더 진리에 가깝게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생각과 관심 분야가 다른 학자를 한데 묶는 데는 노하우도 필요하다. 강 교수는 “그 사람만의 장점을 정확히 짚어내 서로 의지하면서 발전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줘야 한다. 또 포럼을 이끌고 당기는 힘은 관계의 솔직함과 배움을 향한 열정이다. 솔직함처럼 사람의 관계에 큰 힘을 발휘하는 것도 드물다”고 말했다.


『코리아 아젠다 2017』의 집단지성은 최순실 농단에 무너진 한국 사회를 비판한다. 20인 중 한 명인 구민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헌정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공화주의의 위기”라고 진단했다. 한국 사회는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중 민주는 알았지만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공동체의 개념인 공화주의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지금 누리는 부와 권력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공중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보다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자에 대한 갑질, 배려와 염치 없음, 갑을 관계로 얽힌 삶 속에서 우리 모두가 때로는 피해자가 된다. 이로 인해 부와 권력의 세습이 광범위하게 진행하고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판쳐 정치·사회공동체 붕괴현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위주의적 유산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인사권을 명확하게 규정, 검찰권과 인사권으로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시민의식도 꼬집었다. “검은 권력은 시민의 무관심과 무감각·무기력·망각 등을 자양분 삼아 독버섯처럼 자랐다”고 일갈했다.


대통령을 정치의 최정점에 두려는 인식도 비판의 대상이다. 책은 “막강한 대통령 권한의 이면에는 국가와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높은 의존성이 있다. 대통령이 모든 문제의 정점에 서 있을 때 최순실 게이트와 같이 대통령의 권력이 절대화되고 사유화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대통령이 물고기라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국민은 연못인 셈이다”고 지적했다.


책은 또 사익 추구로 변해 버린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5년 단임 대통령직선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결합한 4년 임기의 국회의원선거제 등 ‘1987년 체제’의 개편이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1인당 국민소득 3400달러 시대에 만들어진 구조가 3만 달러를 눈앞에 둔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이 만든 집단지성은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강 교수는 “기술 발달로 인해 글로벌 사회로 변하면서 승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85명의 대부호가 전 세계 인구의 반인 35억 명의 부를 소유하는 글로벌 불평등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국은 저성장 속에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기회에 사회를 개혁하지 못하면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 함께 잘 사는 나라가 돼야 미래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뢰와 법치를 기반으로 한 공정시스템과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강 교수는 중앙일보·JTBC 주도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캠페인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강 교수는 “기술 발전에 맞는 선진 시민으로의 정신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 시민들이 함께 참여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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