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으로] 철책엔 광망, 초소엔 고성능 카메라…초병 대신 영상병이 감시

중앙일보

입력 2017.01.21 00:23

업데이트 2017.01.2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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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진화하는 군 경계근무

“전에는 대부분 경계병력의 오감(五感)에 의지해 경계임무를 수행해 왔는데 지금은 아니야. 영상·음향 감지 센서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시스템을 갖춘다고 해. 병사들의 눈과 귀가 편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나태해지면 안 되겠지?”

작년 12월 과학화 경계시스템 도입
휴전선 240여㎞에 전자감지 장치
철조망 건드리면 상황실에 빨간불
“병사 현장에 없지만 경계역량 강화”
2인1조 초소 감시·순찰 업무 줄여
“유사시 대응태세는 철저히 갖춰”

2005년 11월 16일 국방일보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본 미래의 군대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 과거의 상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기자가 지난 19일 밤에 찾아간 경기도 파주시 반구정 인근의 군 초소는 비어 있었다. 임진강 너머가 북한 땅이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병사들이 강가에 설치한 초소를 지키고, 강변을 따라 설치된 철책을 순찰하느라 바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병사는 보이지 않고 대신 초소의 지붕에 설치된 카메라만 쉬지 않고 움직였다. 카메라는 상하좌우로 수시로 방향을 틀었다. 부대 상황실의 영상 담당 병사가 카메라를 원격 조종하며 철책 주변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군 관계자는 “북한군 침투나 북한 주민들의 귀순을 경계하고 감시하는 병사가 현장에 없지만 오히려 경계 역량은 더욱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진화하는 초병(哨兵)
군이 휴전선 일대를 감시하기 위해 광망과 CCTV를 설치했다. 광망은 그물 형태의 센서로 절단하거나 건드릴 경우 경보를 울리는 감지 센서다. [중앙포토]

군이 휴전선 일대를 감시하기 위해 광망과 CCTV를 설치했다. 광망은 그물 형태의 센서로 절단하거나 건드릴 경우 경보를 울리는 감지 센서다. [중앙포토]

군은 이런 과학화 경계시스템을 지난해 12월 1일 휴전선 전 지역에 도입했다. 전방 철책 240여㎞에 ‘광망(光網)’으로 불리는 장비를 설치했다. 철조망 전체를 그물처럼 생긴 전자감지장치로 덮어 누군가 철조망을 자르거나 건드리면 곧바로 상황실에 빨간불이 켜지는 시스템이다.

폐쇄회로TV(CCTV) 카메라도 철책 곳곳에 달았다. 철조망 북쪽 1㎞의 새까지 관측할 수 있는 중거리 카메라와 최대 400m를 감시할 수 있는 근거리 카메라 등이다. 도심 건물 외부에 카메라와 첨단 센서를 장착해 외부인 침입 시 경보를 울려 보안업체 직원들이 출동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특히 험준한 산악지형이 대부분인 휴전선 일대는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광망이 도입되면서 사각지대가 사라졌다. 이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고라니와 같은 동물들의 움직임에 비상이 걸렸던 상황도 줄어들었다. 2012년 동부전선에서 북한군 병사가 철조망을 넘어 한국군 초소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노크 귀순’과 같은 경계 실패 사례는 옛날 얘기가 될 전망이다.

초병들의 근무 패턴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의 경계근무는 GOP(일반전초) 부대마다 여러 개의 감시초소를 설치해 2인 1조로 초소에 머물면서 주변을 순찰하는 방식이었다. 초소에서 졸거나 딴짓하는 걸 막기 위해 일정한 시간마다 초소를 옮기도록 하는 ‘밀어내기’ 근무를 했다. 또 밤새도록 험준한 산악을 따라 설치된 철조망 주변을 걸어서 순찰했다. 부대마다 운영방식은 다르지만 전반야(前半夜), 후반야(後半夜)로 나뉘어 자다가도 근무시간이 되면 겨울철 영하 30도의 칼바람을 뚫고 눈길을 헤치며 순찰에 나섰다. 중동부 전선의 어떤 부대는 4000개의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해 20대 초반인 병사들의 무릎 연골이 닳아 병원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1990년대 중반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모(44)씨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보면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 정작 감시활동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며 “몸이 고되니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총이나 제대로 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달라진 병영문화

하지만 지금은 육안에 의지하는 과거 방식의 경계활동은 대폭 줄었다. 그렇다고 병사들이 놀고 있는 건 아니다. 상황실의 긴장감은 오히려 늘었다. 과거엔 없던 영상감시병이란 보직이 생겨 수많은 CCTV가 보내오는 영상을 확인하면서 북한군의 동태를 살핀다. 상황실에 이상 신호를 알리는 빨간색 등이 켜지면 즉각 뛰어나갈 수 있게 일부 병사는 출동태세를 갖추고 상시 대기해야 한다.

일부 부대에선 4륜 오토바이를 개조한 ‘산악오토바이’를 이용해 기동성을 높였다. 이준범 육군 공보과장은 “GOP 부대의 주요 임무가 이전에는 철책 순찰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순찰과 초동 대응을 동시에 해야 한다”며 “병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면서도 유사시 대응을 철저히 할 수 있도록 대응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인구절벽으로 인해 우려하고 있는 병력 부족 문제를 해소하면서 순찰 업무에 쏟았던 힘을 전투력 증강 쪽으로 돌렸다는 설명이다. 다만 감시활동을 100% CCTV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니고 장비 고장에 대비해 최소한의 수준에서 철책 순찰활동은 유지하고 있다.

초병들의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 근무 외 시간을 대부분 잠자기로 보냈던 병사들이 최근 책을 펴드는 경우가 늘었다. 어떤 부대는 컨테이너를 이용해 독서카페를 만들기도 했다. 부대에 설치돼 있는 사이버지식정보방(PC방)에서 원격 강의를 듣거나 자격증 취득 공부를 하는 사례도 많아졌다고 한다.

군 당국은 과학화 경계시스템 운영 과정에서 일부 오작동과 결함도 발견했다. 하지만 결함보다는 효과가 더 크다는 판단에 따라 2024년까지 후방지역에도 이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S BOX] 로마제국, 경계근무 태만 초병에 가장 무거운 형벌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

경계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군사 격언이다. 그만큼 경계를 맡은 초병(哨兵)의 임무는 엄중하다. 전사 연구가인 노병천(예비역 육군 대령) 전략리더십연구원장은 “기습을 통해 적에게 물리적 타격뿐만 아니라 정신적 공황을 가해 패배에 이르게 한 사례가 무수하다”고 설명했다. 『손자병법』이 “적이 오지 않음을 믿지 말고(無恃其不來), 적이 공격하지 않음을 믿지 말라(無恃其不攻)”고 강조한 이유다.

이 때문에 과거부터 초병의 군기는 무척 셌다. 로마제국에서 군법에 규정한 형벌 중 가장 무거운 게 푸스투아리움(Fustuarium)이다. ‘장살형(杖殺刑)’이라는 뜻으로, 병사들이 가지나 채찍으로 죄인이 죽을 때까지 때리는 형벌이었다. 반란군, 탈영병과 함께 경계근무에 태만한 초병이 이 형벌을 받았다.

현대에서도 초병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트남전쟁 때 미군은 베트콩의 야습에 골머리를 앓았다. 야시장비나 센서 등 첨단장비를 사용해 봤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전방에 두세 명으로 구성된 청음초(Listening Post)를 세우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들은 한밤중 인기척을 귀로 들어 베트콩의 접근을 탐지했다.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베트남 정규군 1개 연대를 무찌른 짜빈동 전투(1967년 2월)는 청음초가 적을 먼저 발견한 덕분이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정용수·이철재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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