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열세분야 북돋워 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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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동안 우리는 민주화를 협의로 해석하여 권력 대체를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의 수립정도로 생각해온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것을 정치발전의 과제로만 쉽게 규정하곤 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먼동이 트면서 그 파장은 우리의 모든생활영역으로 파급되어 실로 혁명을 통하지 않는 혁명적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음을 본다.
그간 위계적 질서와 권위주의적 자원 배분에 의존하던 모든기성조직은「뒤진 자」의 참여폭발로 무서운 진통을 겪고 있고, 너나 없이 급속한 변화 추세에 맞춰 세상을 보는 눈을바꾸기에 바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주화가 정치문제인 동시에 경제문제요, 또 그것이 바로 사회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민주화의 열풍이 바야흐로 우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권위주의 체제의 잘못이 크면 클수록, 또 그에 의하여 억눌리고 왜곡된 생활질서의 진폭이 크면 클수록 그변화과정은 더욱 급속하고 격렬히 진행될 개연성이 높다.
요즈음 민주화의 열풍이 몰고 온 치열한 노사분규의 현장에서 우리는 실로 새롭게 깨닫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말하자면 뒤늦게 개안이 되는셈이다. 그중의 하나가 현대 산업사회 정치에 있어서 그 성패의 관건은 노·사·정 3자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는데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선진 자본주의적 민주· 복지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적잖은 구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생존·발전할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3자의 관계가 비교적 편향됨이 없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3자간의 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서 서로 대립적 관계로 맞서는 측은 노사 양자고 정부는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할 것이 기대된다.
이들 3자의 관계,특히 노사 양자의 관계가 어긋나서 평형을 잃게되면 이른바 산업 평화에 금이 가게되며,끝내는정치 위기, 나아가서는 체제 위기로 치닫게 된다.그러므로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일수록 노사간의 관계내지 그 갈등을 바르게 조정하는 일이 정치의 요체로 부각되고 있다.
이렇게 볼때 노사관계는 기업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거시적 정치구조 속에서도 그 중요성이 바르게 인식되어야할 것이다. 노·사·정의 관계 양식은 나라마다 일정하지 않다. 그 나라의역사적 체험, 특히 사회경제적 배경이 3자간의 관계를 정립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게된다.
대체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그리고 영향력 있는 노동운동을 거친 나라일수록 노사간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으며, 정부도 편향되지 않은 입장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는 노동자들이 줄기찬 노동운동을 통하여 노동기본권을 쟁취하고 노동정당등을 통해 그정치적 세력을 신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라일수록 노사간의갈등 해결을 위한 제도화된 메커니즘이 발달되어 있고,폭넓은 사회보장제도가 정착되어있다. 노사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면 질수록 경제걱 효율못지 않게 부의 재분배에 마음을 쓰게되며 따라서 복지사회·평등사회로의 발걸음은 빨라지게 된다. 이들 나라들은 노사갈등의 슬기로운 극복을통해 정치체제를 안정시켰을뿐 아니라 고도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할수있었다.
흔히 사회복지국가의 전형으로 불리는 스웨덴은 정부와노사 삼자 간의 정치적 합의를 근간으로 모든 중요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한다. 이 나라의 경우 70년대 한번의 짧은 단절기간을 제외하면 1982년 이후 줄곧 사회민주당이 연립내각의 주역으로 일해봤으므로, 말하자면 노·사·정의삼자중 노정이 연계되어 노동자세력이 우세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노사간의 관계가 대항세력(Gegenmacht)의 관계에서 동반관계(Partnerschaft)로 전이된 오늘날에 있어 3자간의 관계는 큰 무리 없이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이렇게 볼때 노사간의 협조 없이 지탱될수 없는 자본주의사회는 그 초기단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사간의 세력관계에있어 놀라운 변화를 거쳐 왔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흔히 글로 표현할 때에는 노·사·정의 차례를 따르나 그 실세를 비교하면 단연 위의 순서가 뒤바뀐다. 「골리앗」에 견줄만큼 무소부위의정부와 그의 비호아래 자본의논리에 철저했던 기업이 전경에 드러날뿐 노동자는 성장의 그늘속에시 저임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로조건읔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의 지위 상승의 필수조건인 자유·민주노조운동이 억압되었고,∴관제화·형해화한 노총에 제구실을 기대할수 없었다. 따라서 노·사·정의 균형적 관계가 형성될수 없었고 이에따라 정치적 의사 결정과정에서 노동의 소외는 가속화되어 온 것이다.
오늘 한국정치의 새로운 과제의 하나는 노동과 노동자의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들을 정치과정의 또하나의 주역으로 등장시키는 일이다. 노동이익이 정상적으로 표출될수있는 제도적 통로를 마련하고,이들의 열세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제고시킬수 있는 정책적배려를 강구해야할 뿐더러 이들이 자생적으로 펼치는 민주사회주의운동을 정치과정 속에과감히 수용해야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함께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이자본에 대등한 지위로 성장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도와야하며, 그것이 성취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노사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사실도 함께인정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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