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중 46년…눈감은 나치 제2인자|세계서 가장 값비싼 죄인생활한 「루돌프·헤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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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5m높이의 담장과 4천V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6백명을 수용하던 서베를린 슈판다우 형무소에서 20년 넘게 유일한 인인이었던 「루돌프·헤스」의 죽음으로 나치최후의 망령이 사라졌다.
나치독일의 제2인자로서 부총통을 지냈던「헤스」는 1946년 연합국의 뉘른베르크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다른 7명의「히틀러」정권요인들과 함께 슈판다우에 수감됐다.
다른 전범들은 그동안 형기만료나 특사로 1966년까지 모두 풀려났으나 「헤스」만은 서독정부를 비롯한 여려사회단체의 석방노력에도 불구하고 슈판다우를 공동관리하고 있는 미·영·불·소연합국 4개국중 소련의 반대로 풀려나지 못했다.
「히틀러」가 집권하기전 그의「마인 캄프」(나의 투쟁)를 옥중에서 받아쓰고 개인비서를 지내며 심복으로 나치독일의 기반을 닦았던「헤스」는 2차대전 초기인 1941년「영국과 평화협상을 벌이기 위해」단독으로 비행, 영국에착륙했다 붙잡혀 지금까지 46년간 옥중생활을 해왔다.
90세가 넘은「헤스」를 슈판다우에 가두어두기 위해 4개국 군인 42명과 일반관리 직원 21명등 모두 63명의 인력외에 해마다 1백만 마르크(약4억원)의 서독 정부예산이 소요돼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죄수라는 말을 들었었다.
서독정부는「헤스」가 슈판다우를「독차지」하고있는 66년이래 인도적인 이유와 그의 수감이 무의미하다는 이유등으로 석방노력을 해왔고 그의 가족(아들과 부인)을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가 풀어줄 것을 호소했으나 소련측의 완강한 반대로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슈판다우 형무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현재 소련군대를 서베를린에 주재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인데다 나치독일의 상징으로서「헤스」가 그 책임자라는 인식등이 소련의 반대이유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소련은「헤스」가「히틀러」의 지령으로 영국으로 가서 영·독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 그에 대한 나쁜 감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슈판다우의 내부사정은 규정상 엄격히 통제돼 왔다.
그러나 간간이 흘러온 소식으로는「헤스」는 92세의 노인답지 않게 기억력이나 체력이 양호했던 것으로 알려졌었다.
90세가 넘은 나이로 허리한번 구부리지 않고 하루 수차례씩 허용되는 산책때는 「헤스」전용으로 마련된 13만마르크짜리(약 5천만원)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일부러 좁은 층계를 걸어서 오르내렸던 괴짜노릇도 해왔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수 있었던 기회는 하루 4종의 신문(나치관련 기사는 모두 삭제·검열), 한달 한 번의 편지쓰기와 면회가 전부였다.
이처럼 비싸고 외로운 수인의 생일때면 그동안 매년 그의 가족과 사회단체들이 석방 캠페인을 벌여 관심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아무리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이라도 소련을 포함한 4개 연합국에서 20∼25년뒤에 석방하는 것이 관례인 점을 들어 그들은 인도적인 결정을 요구했었다.
또「헤스」가 나치독일 성립에는 기여했지만 2차대전의 수행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가 「전범」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헤스」가 뉘른베르크 재판때「침략전쟁 준비」로 유죄선고를 받고 「비인간적 행위와 전쟁수행죄」부분에서 무죄선고 받은 사실을 이들은 내세웠었다.
특히 그의 변호를 맡았던 한 인사는「헤스」의 전쟁준비가 유죄라면 영·불의 수에즈 전쟁개입, 미국의 베트남개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다를게 뭐냐는 투의 논리까지 내놓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석방되지 못하고 수감이래 한번도 「히틀러」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채 지난 40년동안 슈판다우 안에서 불렸던「넘버7」으로 일생으로 끝마쳤다. <김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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