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이름 앞에 찬양문구 59자…우상화 속도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김정은의 동정을 보도한 15일자 노동신문 1면.

김정은의 동정을 보도한 15일자 노동신문 1면.

새해들어 북한 노동신문에는 작지만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김정은(33)의 직책 뒤에 길다란 찬양 문구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전까지는 노동당 위원장과 국무위원장, 군 최고사령관 등 3개의 직책만 썼다. 그런데 뒤이어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영도자’란 찬양 문구가 따라온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젓갈가공 공장 방문 소식을 전한 15일 자 노동신문 1면 기사의 첫 문장은 김정은을 꾸미는 글귀만 59자에 이른다. 정작 기사 알맹이는 32글자에 불과해 본말이 전도된 느낌을 준다. 김정은을 ‘경애하는 최고영도자’로 부르기 시작한 것도 눈길을 끈다. 지난달 17일 사망 5주기를 맞은 김정일 시신 참배 때는 북한 관영매체들이 김정은에게 9차례나 이 표현을 썼다. 대북 부처는 “김정은 집권 5주년이기도 한 시점에 이런 변화가 첫 감지됐고, 올들어 본격 시행되는 분위기”라고 설명한다.

추천 기사

김정은 찬양과 우상화는 올들어 더 속도를 낼 것으로 점쳐진다. 통일부는 ‘2017년 북한정세 전망’ 자료에서 올해 북한이 ‘김정은 유일지도체계’ 공고화를 위해 대대적 우상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한도 이를 숨기지 않는다. 오는 8월에는 평양과 백두산에서 이른바 ‘백두산 위인 칭송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북한이 백두산 3대장군으로 칭해온 김일성·김정일과 김정숙(김정일의 생모)을 치켜세우는 큰 행사를 연다는 얘기다. 주목되는 건 백두산에 김일성·김정일 외에 김정은 동상가지 세우겠다는 구상이다.

노동당위원장·최고사령관·영도자…
젓갈공장 방문 보도 첫 머리에 붙여
대북제재 여파로 민심은 시큰둥
예고됐던 33세 생일행사 없던 일로

하지만 이런 의욕적 모습과 달리 곤혹스러워하는 내부 분위기도 감지된다. 당장 지난 8일에 33살을 맞은 김정은 위원장의 생일 행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해 10월 “2017년 1월 김정은 각하의 탄생일을 성대히 경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백두산 위인칭송대회 국제준비위’란 기구의 호소문 형태였지만 김정은 관련 예고를 없던일로 넘긴 건 심상치않다. 이를 두고 “유령단체를 내세워 생일 행사 여론을 탐색하려는 전형적인 발롱데세(ballon d’essai) 수법을 구사한 것”(안찬일 한국열린사이버대 석좌교수)이란 분석이 나온다. 북한 주민이나 안팎의 여론이 신통치 않자 없던일로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 우상화에 필수적인 가계(家係)우상화에 큰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생모 고용희(2004년 사망)는 1962년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 출신이다. 고영희의 부친인 고경택은 제주 사람으로, 일제 때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군복공장의 간부로 일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째포’(재일교포를 줄여 비하하는 표현)라고 멸시받던 계층인데다 ‘남조선’에 뿌리를 뒀다는 건 가계 우상화에 치명적이다.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은의 외조부가 항일을 기치로한 김일성 세력을 토벌하려던 일본군의 군복을 만들던 인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자칫 주민들 사이에 “우리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한라산 줄기”라는 비야냥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28)과 친형 김정철(36)의 운신 폭도 좁아졌다. 김여정은 대북제재 리스트에 오르면서 ‘평양 로열패밀리’로 불리는 김(金)씨 일가로 불똥이 번지기 시작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미 국무부는 지난 11일 김여정을 인권범죄와 북한 주민 세뇌공작의 주범으로 낙인했다. 당장 피해는 없더라도 심리적 위축 등 타격은 불가피하다.

막내 김정은에게 후계 자리를 빼앗긴 형 김정철(36)은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다. 직책조차 공개되지 않고 공식석상에 한번도 등장 않았다. 다만 팝스타 에릭 크랩튼의 열렬한 팬으로 2015년5월에는 런던에서 열린 공연을 직접 관람하면서 현지 언론에 노출됐다. 당시 그를 밀착 안내했던 태영호 전 북한 공사는 지난해 여름 탈북·망명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태 전 공사가 김정철을 챙기며 지득한 신병(호르몬계질환으로 후계 탈락) 관련 사항이나 김정은·김여정과의 관계를 알수 있는 정보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울의 핵심 정보 당국자 사이에선 북한 김씨 일가 남매의 내밀한 정보가 한국과 서방 정보당국에 노출됐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