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now] 일본 열도 뒤흔든 '내진 설계 조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설계단계에서부터 내진 강도 계산이 조작된 일본 지바현 시로이의 ‘부실 아파트’ 철거작업이 20일 진행되고 있다.[시로이=지지.본사특약]

일본 지바현 시로이(白井)시의 역앞 광장에 갓 세워진 10층짜리 아파트 '라벨두레'의 철거작업이 20일 시작됐다. 힘들여 지은 아파트를, 그것도 도색까지 다 끝내고 4월부터 들어올 입주자를 기다리고 있던 새 아파트를 중장비를 동원해 부수는 이유는 무엇일까.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진도 5의 지진을 못 버틸 정도로 내진설계가 허약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분양 때엔 내진설계가 완벽하다고 광고했다. 설계에 앞서 구조계산을 담당했던 건축사 아네하 히데쓰구(妹齒秀次)가 건물이 받게 될 하중을 엉터리로 계산해 건물의 내진 강도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두 달 가까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이른바 '내진강도 조작 사건'의 현장이다.

국토교통성 집계 결과 아네하 건축사가 최근 6년간 같은 방법으로 구조계산서를 위조해 설계한 아파트나 호텔이 모두 95곳에 이른다. 강도가 절반 이하로 지어진 아파트는 모의실험(시뮬레이션) 결과 진도 5의 지진이면 무너져 내린다는 예상이 나왔다. 심한 경우는 규정 강도의 15%밖에 안 되는 고층 아파트도 발견됐다. 설계에서부터 철근의 양을 절반 이하로 줄였기 때문이다. 평생 지진 공포를 안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본인들에겐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악성 범죄였다.

이미 입주가 완료된 아파트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이사를 권유했고, 특히 강도 조작이 심한 아파트에 대해서는 강제이주에 해당하는'사용금지명령'을 내렸다. 휴업에 들어간 호텔 30여 곳도 대부분 부수고 새로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다.

아네하 건축사는 "시공회사로부터 철근 수를 줄이라는 압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국회청문회에는 시공회사(기무라 건설)와 분양회사(휴저), 컨설팅회사(소겐) 관계자가 줄줄이 불려나왔다. 휴저는 2000년대 들어 수도권에 파격적으로 낮은 가격에 아파트를 공급해 급성장한 회사다.

건설업계에선 "최근 몇 년 동안 고층 아파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겨난 공기단축과 저가격 경쟁이 이 같은 사고를 불렀다"고 분석했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신뢰의 붕괴'로 규정했다. 일본의 건축 법규는 처벌 규정이 약하다.'살인 맨션'설계의 1차 책임자인 아네하 건축사에게도 벌금 50만엔이 처벌 상한선이다. 감리체계도 허술해 관련 규정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의 건축법은 종사자들의 양심과 도덕성에 의지해왔다는 뜻이 된다.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법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일본 건축은 지금까지 안전성에 문제가 없었고 소비자들의 신뢰도 두터웠다. 확대 해석하면 일본 사회 전반이 그러하다. 서구 국가처럼 법이나 제도에 의한 규제보다는 사회가 불문율로 굳어진 신뢰관계에 지탱해온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내진 강도 위조 사건은 그와 같은 일본 사회의 안전망에 큰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경악하는 이유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