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대통령을 바란다|비폭력의 합법적 개혁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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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화의 여명기를 맞이하여 최근의 정국을 바라보는 감회는 자못 착잡하고 불안스럽기만 하다. 이 시대 국민적 의지의 표상인 민주개혁이 정치적으로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반동과 혁명의 갈림길에서 극심한 혼란에 빠져 끝내는 좌초 내지 붕괴될 우려까지 전망해 볼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치파국을 방지하기 위해 민과 권력의 상이한 욕구와 이해를 매개할수 있는 고리를 발견하는 방법들중의 하나로서 지도자론을 전개해 볼수 있다.
특히 민주주의라는 것을 고작해야 정권교체 정도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준 불행한 우리의 과거 정치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때 앞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전제로한 바람직한 지도자상의 발견은 역설적으로 사회통합을 위해 상당한 의미를 지닐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물론 우상화된 역사 안에서 영웅의 부상이 가능했듯이 지도자론은 자칫하면 반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방향으로 오도될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해방이후 정권 창출이 거의 예외없이 특정인들의 카리스마에 근거해 이루어짐으로써 현실정치가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지배질서의 한계를 기본적으로 벗어날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잘 찾아질수 있으리라 본다.
현금과 같은 전환기적 상황에서 대결보다 화합의 논리에 의해 권위주의적인 정치 질서를 민주화·사회화 시킬수 있는 지도력이 아쉬운 것이다.
흔히 정치는 무술이 아니라 예술에 비유된다. 그것은 힘과 형으로만 되지 않는 앎과 예를 필수로 하는 지배의 도와 술이다.
그것은 강제력에 의존하되 명분을 필요로 하며, 또한 책략에 의거하되 도덕을 밑바탕으로 한다. 바꿔 얘기하자면 명분과 도덕 없는 정치가 맹목적이라면 강제력과 책략 없는 정치는 공허한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속성으로 인해 정치란 실제에 있어 리얼리티와 유토피아가 공존하는 야누스적인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정치를 논함에 있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사실은 해방이후 독재정권의 연속적 출현에 의해 정치는 부재했고 통치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1人 통치자만이 독주하는 상황 아래서 정치는 예술이 아닌·무술로 퇴락했고 정치인의 재생산보다 정략가들의 충원이 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즉 현실정치의 우대로 한국정치는 본질적으로 정략가들의 단원적 투기의 장이었지 결코 정치가들의 다원적 경쟁의 장이 될수 없었다.
강제력과 책략에 익숙한 정략가들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지 명분과 도덕에 고뇌하는 정치가들은 도태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작금 한국정치의 인물 부재 문제도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나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정치 그 자체의 기형성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만약 가까운 장래에 정치 부활이 이뤄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정치인들의 본격적인 성장과 등장을 촉진할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에 대한 현단계에서 국민 모두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지도자는 어떤 자질과 요건을 갖춘 인물이어야 할까.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로서 합법적 절차에 의해 현상을 타파할수 있는 개혁주의자라야 하겠다. 한국사회는 미증유의 자본주의화를 겪어오면서 지나친 국가 주도의 안정과 성장 우선 정책으로 인해 개방적 참여와 분배적정의 면에서 자유와 형평의 가치가 억압과 독점의 논리에 의해 억눌려 왔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순과 비리를 복지 지향의 성숙사회로 지양시킬수 있는 역사적 소명감과 비전을 가진 인물이라야만 미래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있어 제도개혁을 엘리트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민중의 이념에 기반하여 혁명적이긴 하되 혁명에 의존하지 않는 비폭력의 다원적이고 경쟁적인 정치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민주인사라야 될것이다.
이러한 인물은 복지지향의 성숙사회 성취를 항시 자아혁신과 계발을 통해 추구할수 있는 덕성을 전제적으로 갖추어야만 한다. 자기모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로써·개인의 성숙과 사회의 완성을 윤리적으로 결합시킬수 있는 수범적 인물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냉철한 두뇌와 깨끗한 마음을 기반으로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확고한 책임감을 겸비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족벌주의적이고 한탕주의적인 이해 결집을 중화시킬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국민적 지도자라면 적어도 미래의 사회변동에 대비해 다양한 사상을 폭넓게 수용할수 있는 혜안과 포용력을 지녀야 될 것으로 여겨진다. 지도자가 경직화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때 사회갈등의 해소는 어렵게 되고 끝내 극단 논리의 첨예한 대결에 의해 정치 위기가 심화될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더우기 국제적으로 냉전과 열전이 교차하는 상황 아래서 민족공동체의 동삼이 절실히 요망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자주의지를 강력히 갖춘 진보적인 통일지향의 인물이어야할 것이다.
위에서 간략히 열거한 자질과 요건을 갖춘 정치인이 우리 주위에 그리 흔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부위논적 지도자상은 역사에서 추출된 이념형에 불과하지만 그 근사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도 절실히 고대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형편인 것이다. 전국적으로 이름석자가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찾아볼수 있으나 과연 이들이 지명도에 걸맞게 민중의 삶에 뿌리박고 있는지는 일단 회의적이다.
「토크빌」의 말마따나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듯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정치인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국민은 「사자의 폭력」이나「여우의 간지」만을 갖는 지도자에 대해 식상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사람을 키워줄수 있는 정치 풍토가 이뤄질수 있을 때 탈엘리트적인 큰 인물도 기대해 봄직하다고 말할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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