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잣대'에 재계 위기감 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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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호 전경련 회장,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 이수영 경총 회장, 김용구 중소기협 중앙회장, 김영배 경총 상임부회장(오른쪽부터) 등 경제단체장들이 17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국가인권위원회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권고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경제5단체장이 17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정책기본계획(NAP)에 대해 발표한 성명서에는 아슬아슬할 만큼 높은 수위의 표현이 많았다. 성명 길이도 재계가 발표해온 여느 성명서의 서너 배나 됐다. '점잖은' 단어를 골라 '간단하게' 언급해온 재계의 평소 대외 문건과는 달랐다. "지극히 이상론적인 '노동인권'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발상" "불법.폭력 시위로 인해 희생당한 경찰과 부모의 인권보호에 대한 권고안은 왜 없는가" "인권위는 '헌법 위의 기관'이 아니다" 등의 구절이 보인다. 심지어 "차기 인권위 재구성 때에는 균형된 시각과 사회적 덕망을 쌓은 인사들이 참여해야 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성원에 대해서까지 직격탄을 날렸다. 작심을 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도발적' 언급이다.

이번 문건 작성은 평소 '재계의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지닌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상임 부회장이 주도했다. 김 부회장은 그동안 참았던 말을 쏟아내 속시원하다는 표정이다. 성명서 작성 책임을 진 그에게 경제5단체장은 "이번에 제대로 의견을 밝히되 오해받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견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는 것. 김 부회장은 "경제적인 문제까지 인권의 잣대로 재단하면 남는 것은 분배와 평등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성명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표현이 과격하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었으나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효과적이라는 견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재계가 이 문제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노사 문제를 다루는 경총으로서는 인권위 권고안에 들어 있는 ▶비정규직 고용 억제▶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정부의 직권중재 축소 등에 대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수영 경총 회장은 "이번 권고안대로 정책이 입안될 경우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와 시장경제의 기본틀이 흔들릴 우려가 있어 재계가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경제5단체장은 ▶양심적 병역거부나 공무원 노조의 정치활동을 확대하는 내용은 대법원 판례와 상치되는 등 위헌 소지가 있으며▶비정규직 노동자 고용 억제 및 차별금지 등은 노동시장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며▶노사정위원회가 있는데도 인권위가 노동 문제까지 개입하는 것은 본래의 활동범위를 넘어선 것이라며 인권위 권고안을 비판했다. 재계에는 여전히 정부와의 정면 대결을 부담으로 느끼는 분위기가 있다. 일선 기업으로서는 정부와 재계의 갈등 양상을 팔짱낀 채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수영 회장은 성명서 낭독에 앞서 "이번 모임은 인권위에 대한 입장이지, 정부 정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최근 재계의 자세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목소리를 낮춰왔던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참여정부가 임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정부와 재계가 긴장국면으로 돌아서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인권위 권고안 가운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이를 걸러 수용할 듯하다. 정부는 17일 이해찬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이 같은 방침을 정하고 조만간 관계장관회의에서 인권위 권고 수용 여부를 논의키로 했다.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관계장관 회의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은 거른 뒤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현상.서경호.정철근 기자 <leehs@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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