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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잘 ‘버무린’ 미술 이야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3호 32면


서로 다른 두 분야를 동시에 섭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섭이니 융합이니 말은 간단해도 제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할 터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두 봉우리를 자유로이 오간다. 스케이트 보드 선수가 반구(半球)를 이켠에서 저켠으로 신나게 오르내리듯, 이 얘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다른 얘기로 이어진다. 그 비결은 바로 즐거움에 있는 듯하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비슷한지 서로 비교하고 그러면서 깨닫는 재미 말이다.


어릴 적부터 요리를 좋아했던 저자는 외국계 명품기업에서 일하다 문득 요리 유학을 떠났다. 저명한 요리학교인 뉴욕 CIA에서 공부하고 현지 식당에서 경험을 쌓은 뒤 돌아와 오너 셰프로서 컨템포러리 퀴진을 선보였다. 식당을 접었을 때, 새로운 열정의 원천이 된 것은 평소 좋아하던 현대 미술이었다. 미술관과 갤러리 탐방, 아트페어 참관, 전문 서적 숙독을 통해 그는 ‘미식’과 ‘미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묶어냈다.


최근 요식업계의 새로운 트렌드인 푸드 트럭과 길거리 음식을 거리의 낙서 예술인 그래피티와 연결하고, 남성용 소변기를 가져다 ‘샘’이라고 이름 붙인 뒤샹의 레디 메이드 예술과 이미 만들어진 레토르트 음식의 연관성을 말하는 식인데, 그 진폭이 종횡무진이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인 최초로 미슐랭 쓰리 스타를 받은 셰프 괄티에로 마르케시는 자신이 흠모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의 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드리핑 디 뻬쉐(영어로는 Dripping Fish)’라는 이름의 해산물 전채 요리로 풀어냈는데, 저자는 그가 폴록의 어떤 작품에서 그런 감동을 받았을까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편다. 그리하여 폴록이 전성기 직전에 그린 ‘아른아른 빛나는 물질(Shimmering Substance)’(1946)을 보여주면서 그의 요리 사진과 연관성을 찾아낸다.


사진 같은 정교한 그림을 뜻하는 극사실주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진짜와 가짜가 혼재하는 시뮬라크르적 세상에서의 먹거리로 이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가 사례로 든 것은 ‘콘소메 맛 팝콘’이다. 콘소메는 서양식 맑은 쇠고기국 같은 것인데, 기초 중의 기초 요리지만 만들기가 매우 까다로운 음식이기도 하다. 이 과자의 맛에 대한 찬양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저자는 “그 과자는 콘소메가 진정 맑은 스프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저 길고 까다로운 조리 과정이 ‘함축’ 아닌 ‘생략’의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과자에서 콘소메의 맛이 극사실적으로 구현됐다면 그건 틀림없이 마법의 가루로 불리는 인공 시즈닝(artificial seasoning) 덕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는 극사실주의 화가가 아니라 극사실주의에 미학적 기반을 두되 허구적 상상력을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허구적 현실주의’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강형구 화백의 인용문까지 더해지면,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지 새삼 생각을 곱씹게 된다.


글 곳곳에 나오는 전문 용어를 자연스레 익히는 재미도 크다. 안심과 등심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부위인 ‘포터하우스(Porterhouse)’나 스테이크의 겉면을 코팅하듯 지져주되 속살은 레드 상태로 유지하는 단계를 뜻하는 ‘블루(Blue)’, 육류에 열을 가하면 녹아내린 지방과 젤라틴이 육질 속으로 스며들어가 발생한 다즙을 의미하는 ‘서큘런스(succulence)’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요리 시작 전 모든 것이 반드시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주방의 철칙, ‘미장플라스(mise-en-place)’라는 단어에서는 요즘의 우리 현실이 역설적으로 오버랩됐다.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는데, 2부 뒷부분은 커피·와인·치즈에 이어 식도락에 대한 이야기로 끝난다. 마치 코스에서의 디저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렇다면 1부 첫 에피소드를 쇠고기 얘기보다 샐러드 얘기로 시작해 정찬과 비슷한 구성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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