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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영국 근무 때 삼성전화 금지령…평양서 LG폰은 몰라 난 그걸 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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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태영호 전 공사와의 인터뷰는 예정된 2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됐다. 중저음 목소리에 또렷한 발음, 유머 감각까지 갖춘 달변가인 태 전 공사는 한국 정착 후 어떤 소주 브랜드를 좋아하게 됐는지까지 상세히 털어놨다. 유창한 영어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그는 거침없이 자신의 최근 생활을 얘기했다. 그는 2일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가 태영호 전 공사의 망명을 단독 보도한 중앙일보 지난해 8월 16일자 6면.

이영종 통일전문기자가 태영호 전 공사의 망명을 단독 보도한 중앙일보 지난해 8월 16일자 6면.

지난해 12월 27일 기자간담회에서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게 화제가 됐는데.
“자유의 땅인 대한민국 영토를 밟는 순간 외치려고 했는데 도착하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지금은 탈북민 안전이 우선이어서 조용히 (입국)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기자간담회에서 모두발언을 통해 저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요즘엔 두 손 들고 만세를 외치지 않는다며 보기에 좀 그렇다는 말도 들었다. 과거엔 한국 사회의 안보의식이 상당히 강했는데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싶다.”
한국에 살아보니 어떤가.
“일단 느낀 건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됐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살던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하다. 식사도 주문하면 금방 배달 오고, 빈 그릇을 문밖에 내다 놓으면 조용히 가져가고. 유럽에도 이런 건 없다. 처음 본다. 봉사(서비스) 문화도 그렇다. 식당 등에서 한국 여성분들은 말을 엄청 예쁘게 내더라(하더라). 그리고 아주 친절하다. ‘한강의 기적’이란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에 나라의 면모가 탈바꿈할 수 있는지 놀랐다. 식당에서 엄청난 양의 음식을 버리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북한에선 먹을 것이 부족해 김치 요만큼도 돈을 받는데 한국에선 음식이 대량 낭비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국회방송 등을 통해 본 청문회 모습도 의외였다. 국회의원들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보다 높은 단상에 서서 고성을 지르고, 정부를 공격하더라. 영국에서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런 광경은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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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전 공사는 요즘 밤잠을 잘 못 이룬다고 했다. 그때마다 냉장고를 열고 한국 소주를 찾게 된다고 했다.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과거가 생각나고 북한에 두고 온 이들 생각도 나고 그래서…. 한동안 나도 모르게 저절로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마시고 그랬다. 그런데 집사람이 ‘한국에 와서 더 많이 마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더라. 지금은 술을 끊다시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건강을 잘 돌봐야 김정은 정권이 무너지는 걸 보지. 그렇지 않으면 김정은보다 내가 먼저 죽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참이슬(소주)을 마신다. 폭탄주는 마시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도 술을 대단히 좋아한다. 남자들은 자기 집을 잘살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니 퇴근 후 가장의 입장에선 속이 상하고 전기도 없어 문화활동도 못하니 술밖에 마실 게 없다.”

그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오랜 기간 키워 왔다. 지금 쓰고 있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도 꺼내 보였다. 영국에선 LG전자 제품을 썼다고 했다.

영국에 있을 때도 한국의 경제 발전 수준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해외에 파견된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산 제품을 즐겨 쓴다. 아마 동족 심리 때문일 것이다. 동족인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었기에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라는 생각도 하고. 이 때문에 평양으로부터 금지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해외 북한인들이 삼성 제품을 즐겨 쓰는 것을 알고 김정은은 지난해(2015년) ‘절대 삼성 전화는 쓰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대사관에서 삼성 전화를 100% 회수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뭐냐면 LG전자가 있다는 건 모르더라. 그래서 나는 LG 폰을 사용했다(웃음).”
북한 내에서 한국 제품의 인기는.
“장마당(사설시장)에서 한국산은 너무 인기가 좋아 중국산 짝퉁이 대거 나돌 정도다. 북한 여성들에게 인기인 설화수 화장품은 중국산 짝퉁이 많다. 상인들은 ‘(짝퉁 제품을) 쓰다가 이상하면 가져와라. 다시 환불해 줄 테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밥가마(전기밥솥)도 큰 인기다. 장마당 아주머니들이 손님을 보고 ‘이분은 돈이 좀 있다’ 싶으면 ‘아랫동네(남한) 물건 있는데 써보겠느냐’고 묻는다. 한국 밥가마에서 서울 말씨로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알람이 나와 보위부원들이 문제 삼기도 했다. 그래서 말하는 기능을 없애는 기술도 나왔고, 나중엔 ‘남한 브랜드지만 중국에서 만든 제품이라 괜찮다’고 했다.”

태 전 공사는 또 “생각하던 한국과 겪고 있는 한국이 다르다”는 말도 했다. 런던에서도 한국 언론사 앱을 통해 뉴스를 보고 한류 콘텐트를 접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생각 못했던 부분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좀 더 생활해 본 뒤 얘기하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어떻게 정착하고 있나.
“아내와 애들 모두 상당히 좋아하고, 정착도 잘하고 있다. 아들 둘은 한국 대학에서 공부를 시킨 뒤 석사 과정을 위해 미국 등에 보내고 싶은 생각이 있다. 탈북민들을 위해 대학 입학을 특별히 배려하고 학비를 혈세로 지원한다고 하니 감사하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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