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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다시 꺼내 든 반계수록과 100년 뒤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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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김기찬
논설위원
고용노동선임기자

‘과거시험이라는 것이 문장을 짜 맞추는 데 불과하다. 그래서 문장만 긁어모으고 외우는 데 치중한다’ ‘학문과 재주가 형편없고 행실이 바르지 못한 자가 추천되면 추천한 자도 나라를 기만한 죄로 다스린다’ ‘사욕에 바탕을 둔 노비세습제는 천하의 악법이다. 노비 수를 줄이고, 품삯을 주고 고용하자’ ‘왕실 재정을 따로 하지 않고, 국가 재정을 일원화한다’ ‘임무가 없는 관직과 쓸데없는 관청을 혁파한다’ ‘초야의 선비는 수양하는 데 뜻이 있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일에 대해선 뜻을 못 세운다’ ‘토지제도를 바로잡지 못하면 사회구성원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국가가 혼란에 빠지며 정치나 교육도 소홀해진다’.

400년 전 개혁안과 촛불 민심 근간은 ‘경세제민’
진통제 대신 근본 처방으로 나라의 틀 확 바꿔야

지금으로부터 360여 년 전 나온 국가 개혁안이다. 피폐한 조선을 일으키려는 충정에서 나왔다. 은둔한 선비가 냈다. 반계(磻溪) 유형원이다. 조선시대 민심의 촛불이라 할 만하다.

이걸 요즘 에 빗대면 이렇지 않을까.

‘채용시험에 창의성이 없고, 취업준비생은 스펙을 짜 맞추고, 시험 기술을 부리는 데 몰두한다’ ‘소위 금수저 또는 줄을 잘 서서 뽑힌 사람이 있다면 그를 추천한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비정규직을 점차 줄이고, 제대로 임금을 주자’ ‘비대한 권력을 재확립한다’ ‘자리 챙기기식 낙하산 인사를 없애고, 불필요한 정부 기구를 없앤다’ ‘계파정치에 참신한 신진 인사는 힘을 쓰지 못한다’ ‘고용시장을 개혁하지 않으면 대다수 구성원인 근로자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고, 사회불안 요인이 된다’.

이렇게 바꾸고 보니 지금 한국 사회에 딱 들어맞지 않는가. 그래서 창피하다. 4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린 정말 변한 게 없었던 셈이다. 초야의 민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데 말이다. 자괴감과 한탄, 분노가 뒤섞여 치밀어 오른다.

하기야 그때도 개혁안은 폐기되다시피 했다. 인쇄술이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건만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반계가 신랄하게 지적한 소수의 기득권이 향유하는 바로 그 폐해 때문이었다. 그가 32세 젊은 나이에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며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집필한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인쇄됐다. 그나마 중앙관청 서고에 꽂아 놓을 정도로 양이 적었다.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아 선비가 볼 수도 없었다. 금서 아닌 금서였던 셈이다. 기득권의 힘은 그렇게 강했다.

노동개혁이나 교육개혁, 금융개혁, 국방개혁, 규제개혁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400여 년 전 반계가 내놓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것들이 좌초한 이유도 반계수록이 인쇄되지 못한 것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정병석 전 노동부 차관이 쓴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는 이렇게 꼬집고 있다. “조선은 가난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근검절약하는 청빈한 삶, 안빈낙도의 철학을 숭상한 탓이다. 기술적 발달이나 개혁정책은 모두 막으려 했고, 백성을 위한 정책보다는 기득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우선시했다.”

촛불 민심과 반계수록의 근간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다.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거다. 경제는 경세제민의 약자다. 국가 시스템을 확 바꾸지 않으면 경제도 없다는 말 아닐까.

그동안 개혁 주장이 안 나온 건 아니다. 힘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순간의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 정도에 그쳤다. 호들갑 떨며 단행된 연금개혁이니 비정규직 보호대책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부류다. 기득권은 진통제를 주며 챙길 것 다 챙겼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더 빈곤하고, 부유한 사람은 더 비대해져 갔다. 그사이 4차 산업혁명이 몰려와 우리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섰다. 백성의 근간인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진통제에 익숙했던 백성은 촛불을 들었다. 민심의 거대한 파도를 타고 기득권의 시커먼 속살이 수면으로 부상했다. 근본적인 처방과 그에 따른 치료를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호의 리셋(reset)이다.

정조는 반계수록을 접하고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에 마치 오늘의 역사를 본 것처럼 논설하였다.” 새해 아침에 꺼내 든 반계수록은 100년 뒤 대한민국에 어떤 말을 던질지 궁금하다.

김기찬 논설위원·고용노동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