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와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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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72년 9월 5일 새벽 뮌헨올림픽 개막을 불과 닷새 앞두고「인류의 성전」이 피로 얼룩졌다.
불과 8명의 아랍 코만도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인의 잔칫상을 뒤엎은 것이다.
그 소동으로 9명의 이스라엘 선수와 8명의 아랍 게릴라를 포함해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뮌헨올림픽은 자동 폐회될 처지였다.
그러나 6일 메인 스타디움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원에 대한 추도식 직전에「브런디지」 IOC위원장은 대회속행을 결정, 발표했다.
『올림픽정신은 폭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불굴의 신조가 그때 표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은 대회 위원장인「하이네만」대통령과「브란트」수상 등 서독정부 수뇌의 강력한 요구의 반영이기도 했다.
대회가 중단되면 2O억 마르크를 투입한 시설 운영비가 낭비되는 한편 게릴라를 막지 못했다는 비난으로 서독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된다는 상황에서 그들은 과감한 강행을 결정한 것이다.
68년 멕시코올림픽 때도 엄청난 유혈사태가 있었다.
대회개막 10일을 앞두고 멕시코 시에서는 탱크를 앞세운 육군과 소총, 자동권총, 사제폭탄으로 무장한 1만명의 학생들이 충돌, 2백 60명이 죽고 1천 2백 여명이 부상하는 참극을 빚었다.
그런 상황에서「브런디지」는 예정대로 올림픽을 연다고 발표했고 멕시코 정부도 이를 따랐다. 그때「가르시아」 국방상은『학생데모가 유혈화 한다고 해서 비상사태를 선포할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바탕의 소요후에 멕시코 전국 학생맹휴협의회가 올림픽 기간중의 데모중지를 지시한 것도 인상적이다.
근대올림픽의 역사는 이처럼 순탄치 않다. 1896년 제1회 아테네대회 때만해도「트리쿠피츠」수상의 실각을 거치며 그리스는 겨우 올림픽을 치렀다.
전쟁으로 올림픽이 중단된 것은 1916년 제6회 베를린대회와 40년, 44년의 올림픽등 세번이나 됐다..
88년의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우려와 논란이 일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다른 곳에서 치르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저들의 걱정을 불러일으킨 우리의 형편이 한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위기관리와 극복에는 자신이 있는 민족이다. 6·26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르며 민주주의를 했고 폐허를 딛고 일어나 세계에 건실한 경제력을 인정받고 있는 국민이다.
우리가 대화와 합의로 멋들어진 올림픽을 치르지 못할리가 없다. 지금이 바로 한국인의 긍지를 정말 과시할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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