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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모더니즘, 국경을 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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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24면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커피 테이블과 의자

카레 클린트가 디자인한 르 클린트 조명.

언제부터인가 북유럽 디자인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북유럽 스타일 하면 떠오르는 많은 제품들이 사실은 덴마크 것이다. 카페, 식당, 미술관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세븐 체어, Y 체어, 판톤 의자, 루이스 폴센의 PH 시리즈 램프들, 르 클린트의 주름진 램프들, 스텔톤 보온 저그 등이 모든 덴마크 제품들이다. 그러니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덴마크 디자인전은 곧 북유럽 디자인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덴마크 디자인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다. 1950년대 GM이 제작한 ‘미국 스타일리스트의 감탄’은 편리하고 아름다운 제품들로 가득 찬 미국 가정생활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홍보영상인데, 여기에 예외적으로 미국 제품이 아닌 것이 등장한다. 바로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덴마크 식탁과 의자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대니시 모던(Danish Modern)’이라는 이름으로 덴마크 가구가 크게 유행했다. 그리하여 미국 대선 역사상 첫 번째 TV 토론 프로그램에 후보들이 앉은 의자로 한스 베그너의 ‘더 체어’가 선정되기에 이른다.


가까운 일본 역시 전후의 경기 호황기를 맞이하면서 덴마크 가구, 또는 덴마크 풍 가구가 인기였다. 일본의 세계적인 컬렉터인 오다 노리츠구의 컬렉션에도 덴마크 의자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대니시 가구, 덴마크 디자이너인 핀 율과 한스 베그너의 단행본을 낼 정도로 덴마크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의 가리모쿠는 노골적으로 덴마크 가구를 흉내 낸 브랜드다. 사실 가리모쿠 말고도 덴마크 스타일을 표방한 가구는 전세계에 널려 있다. 한국에서도 21세기에 들어와 카페와 식당에서 덴마크 가구가 크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북유럽 스타일은 한국인의 인식에 들어와 있는 몇 안 되는 가구 스타일이다.

따뜻하고 편안하며 정이 가는 덴마크식 거실 풍경.

[“과거와 단절하지 않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


왜 덴마크 디자인이 그토록 인기가 있을까. 그것은 인본주의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일어난 모더니즘은 독일과 국경을 맞닿은 덴마크로 전해졌다. 기능주의를 주장한 독일의 모더니즘은 진정한 기능주의라기보다 시각적 기능주의의 측면도 강했다. 또한 스타일이 굉장히 강해서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을 주었다. 덴마크는 이런 과격한 모더니즘을 좀 더 친근하게 번역했다. 그 중심 인물이 이번 전시회 첫 번째 방에 마련된 카레 클린트다.

카레 클린트의 ‘사파리 체어’(1933). ⓒ Designmuseum Danmark/ Pernille Klemp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는 카레 클린트 섹션에는 사파리 의자가 놓여 있다. 이 의자는 영국 군인들이 19세기부터 야영지에서 쓰던 것을 거의 바꾸지 않은 것이다. 대신 재료와 마무리 상태, 접합 부위 등을 좀 더 세심하게 다듬고 만듦새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클린트는 이처럼 예전부터 있던 가구를 가지고 부족한 점을 찾아내 보완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독일이나 네덜란드, 프랑스의 급진적인 모더니스트들과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다. 그들은 과거와 단절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했었다. 바로 이 점, 과거의 유산과 단절하지 않는 것이 덴마크 디자인, 나아가 북유럽 디자인의 큰 특징이다.


카레 클린트는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1950년대 대니시 디자인을 이끈 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선구자다. 그는 이미 1920년대에 인체의 치수와 가구와의 관계를 연구했다. 이는 인체공학 디자인의 선구적인 사례다.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건 덴마크 디자인이 독일의 급진적인 모더니즘보다 더욱 기능주의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폴 헤닝센은 빛이 사람의 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는 전구의 광선이 지나치게 밝고 세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눈이 부심은 물론 실내 분위기가 날카로워진다. 그는 이를 해결하고자 전구를 감싸는 3-5개의 중첩된 갓을 디자인한다. 이로써 전구의 강렬한 빛이 부드럽게 분산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처음 나온 헤닝센의 PH 램프는 해를 거듭할수록 업그레이드돼 1950년대에는 72개의 갓을 가진 아티초크를 낳기에 이른다. 기능주의에서 시작해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덴마크 디자인은 결국 디자이너 개인의 자의식을 투영한다기보다 사람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기능과 심리적인 편안함에 더욱 집중한 것이다. 나무와 가죽 같은 천연 재료를 많이 쓰고 장인의 기술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은 이런 인본주의 디자인과 맞닿아 있다.

아르네 야콥센의 ‘SAS 로얄호텔을 위한 에그 체어’(1958). ⓒ Michael Whiteway

베르너 판톤의 ‘하트 콘 체어’(1958). ⓒ Michael Whiteway

핀 율의 ‘치프테인 체어’(1949). ⓒ Designmuseum Danmark/ Pernille Klemp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인본주의]


그렇다고 덴마크 디자인이 개성이 없다는 건 결코 아니다. 대니시 디자인을 이끈 대표적인 디자이너라고 한다면 아르네 야콥센, 한스 베그너, 핀 율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아르네 야콥센은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의자인 세븐 체어와 개미 의자를 디자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량생산에 적합한 것을 디자인하면서도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을 살렸다. 그것은 유기적인 곡선의 표현이다. 단순하지만 그만의 선이 살아 있다.


반면 한스 베그너는 우리에게 따뜻한 정서를 불어넣어주는 친근한 의자를 디자인했다. 금속의 사용을 절제하고 나무와 골풀, 천 같은 재료를 가지고 과잉된 표현 없이 단아하고 대단히 완성도 높은 의자를 디자인했다. 핀 율은 의자 프레임을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그의 디자인은 최고의 장인이 아니면 제작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난해하다. 반면에 베르너 판톤처럼 선배 디자이너들과는 전혀 다르게 팝아트적이고 생기발랄한 가구와 조명을 디자인한 파격적인 인물도 있다. 이 또한 덴마크 디자인의 유산 중 하나다. 그에게 인본주의란 사람을 심리적으로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덴마크 디자인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또 하나의 배경에는 가족주의도 한몫 한다. 그들의 삶 속에 가족과 함께 하는 문화, 또는 이웃이 서로 작은 파티를 하고 정을 나누는 문화는 굉장히 자연스럽다.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명품과 비싼 자동차보다 집의 실내 환경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꾸미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 절실하고 중요하다. 그러한 문화가 덴마크 디자인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11월 2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


글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kshin2011@gmail.com,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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