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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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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제품을 사면 항공사 마일리지를 준다는 어느 회사의 광고를 발견한 남자가 있다. 그는 전단지를 유심히 분석하다가 그 회사가 출시한 제품 중 가장 싼 푸딩을 사면 단돈 몇천 달러로 평생 공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마일리지를 모을 수 있다는 걸 발견한다. 슈퍼마켓에 달려간 남자, 그는 카트가 넘치게 푸딩을 사 모은다. 그리고 자신의 회사에 푸딩을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렇게 사놓은 푸딩은 단 하나도 먹지 않으면서!


이 엉뚱한 괴짜의 이름은 배리 이건. 그는 말 많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일곱 누이들 틈에 끼어 ‘비밀 따윈 없는’ 집안에서 아웃사이더처럼 자랐다.


그날 아침, 그는 사실 누군가 버리고 간 풍금 하나를 발견했다. 풍금을 사무실로 옮긴 직후, 사무실 옆의 카센터로 한 여자가 조심스레 들어온다. 이른 아침이라 오픈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여자는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자동차 키를 맡긴 채 자리를 떠난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멍한 얼굴로 여자의 뒷모습을 보던 배리는 막연히 현기증을 느낀다.


근무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저녁 파티에 올 거냐는 누나들의 극성스러운 전화를 받은 그는 조금씩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다가 누나의 집 앞에서 여러 번 망설인다. 파티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왜 연애를 안 하는지, 결혼 생각은 없는지,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등등 쏟아지는 누이들의 질문 폭탄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고민 끝에 파티에 들어간 그는 술김에 매형에게 최근 자신이 겪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전 제 자신이 가끔 싫어요. 의사니까 상의 드리고 싶어요.” “배리, 난 치과 의사야!” “그래도 의사는 환자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음… 전 가끔 혼자 이유 없이 울어요.”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진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엎어져 운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폰섹스 회사에 전화해 외로움을 달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신상을 홀랑 털린다. 전화 속 여자가 무섭게 돌변해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아는 사람들에게 폰섹스 사실을 모두 알리겠다는 협박을 한 것이다. 악질적인 매춘 업자의 협박에 몰린 배리는 다음 날 자신이 털어놓은 은밀한 고민이 누이들에게 모두 공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매형이 그러는데 너 밤마다 울고 그런다며? 정신과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냐?”


더 말해 뭐하랴. 최악의 하루가 시작되려는 찰나, 어제 자동차를 맡기고 사라진 그 여자 ‘레나’가 나타났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누이의 직장 동료에다, 심지어 누이가 소개팅해주려고 했던 여자였다.


“저기 저…내일 저녁 밖에서 먹을 건데 같이 먹을래요? 저 데리러 오실래요? 주소하고 전화번호 적어 드릴까요?”


배리는 여자의 질문 공세에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밀당’ 대신 맹목적 솔직함 택한 여자]


‘매그놀리아’를 만든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2002)는 얻어맞듯 사랑에 취해 서로에게 빠져들게 되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감정의, 감정에 의한, 감정을 위한 영화인 셈이다.


과학자에게 종종 사랑은 호르몬 작용이다. 사랑이 세로토닌 수치를 낮추고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수치를 뒤죽박죽 섞어 사람의 마음을 칵테일처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을 매력 자본의 교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결혼 이전의 단계일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각자의 가치관과 경험에 빚진다. 그러므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애초부터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사랑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랑을 어떻게 느끼는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를 끝없이 불안하게 만들어 사랑을 쟁취하는 법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자랐다. 그것이 소위 사랑의 자기계발화다. 사랑을 일종의 ‘밀당 게임’내지는 ‘갑을 관계’로 폭락시키는 프레임 말이다.


그런데 이 여자 레나는 애초에 이런 밀당 게임엔 전혀(!)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그녀에겐 직관적이고, 순수하며, 충동적이고 무모하기 때문에 더없이 뜨거워지는 마음만 있다. 레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감정에 돌진하는 여자다. 그녀에게 사랑의 윤리란 감정에 대한 맹목적인 솔직함이다. 집에서 폰섹스나 하며 푸딩이나 사 모으는 도시의 고독남이 구원받는 건 결국 이런 레나의 폭발하는 사랑 덕분이다. 이들 커플 주위에선 그러므로 산처럼 쌓인 푸딩이 무너지고, 자동차가 박살나고, 세트가 붕괴하듯 부서지는 풍경들이 끝없이 배경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그들의 내면에서 폭탄처럼 터지고 있는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그림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현장의 컨설턴트로 일하는 레나가 금요일에 하와이로 떠난다는 걸 알게 된 배리는 자신이 모으고 있는 항공사 마일리지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한다. 누군가에게 한 번도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는 결국 약속도 없이 하와이로 떠난다. 100번 이상 비행기를 탔던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그는 자신을 바꿔보기로 한다.


[아담 샌들러에게서 늑대소년의 얼굴을 보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아담 샌들러(배리 이건 역) 없이는 도무지 불가능한 영화다. 악질 폰섹스 업체의 협박 전화를 계속 받던 그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화장실의 기물을 부수고 돌아와 레나 앞에 앉았을 때나, 범인이 당신이냐고 묻는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저 아닌데요?”라고 태연히 말하는 장면을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를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 샌들러의 얼굴에선 자신의 마음을 ‘분노’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외로운 늑대소년의 얼굴이 보인다. 시한폭탄을 들고 그것을 제거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 말이다.


끈질긴 폰섹스 업체가 결국 폭력배까지 보내 레나의 신변까지 위협하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찬 늑대소년처럼 조직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 나선다. 한 손에는 통화 중에 분노로 망가뜨린 회사 수화기를 든 채로 말이다. 그는 악질 업체의 보스인 ‘매트리스 맨’과 결투를 불사하며 말한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해! 나 같으면 말한다. 나는 지금 무지 세거든. 나는 사랑에 빠졌어. 나 같으면 미안하다고 말할 거다!”“경찰에 신고했냐?”“아니.”“미안해!”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나왔다. 악당 역시 배리의 러브 파워를 알아본 것일까(악당은 ‘매그놀리아’에도 출연했던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맡았다). 나는 ‘코미디’에 대한 우디 앨런의 정의만큼 참신한 걸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코미디= 비극+시간.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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