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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 대신 설레임 선택한 그녀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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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나는 공항이 무서워요!”


토론토행 비행기에 탄 여자가 말한다. 여자는 옆 좌석 남자에게 자신의 공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공항에서 비행기 환승하는 게 무섭다고. 환승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길을 잃을 테고, 넓은 공항 한구석에서 누구도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모른 채로 죽어갈 거라고 말이다.


여자의 공포는 비행기를 실제 놓치는 게 아니다. 그녀는 비행기를 놓치게 되는 상상이 자신을 두렵게 한다고 말한다. 어떤 것들 사이에 끼어버리는 게 싫다고 말하는 이 여자에게 옆자리 남자가 진지하게 말한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 같네요!”


사실 이들은 비행기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었다. 둘은 몬트리올의 한 유적지에서 연극을 보다가 우연히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연극은 간통죄를 재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창문 밖 이웃이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를 함께 타고 온 그들. 내리기 직전, 불안한 얼굴의 여자가 비장한 얼굴로 말한다. “저 결혼했어요!”


언젠가 책을 쓸 요량으로 취재 여행을 다녀왔던 그녀의 이름은 마고. 결혼 5년차로 남편인 루는 세상 모든 닭고기 요리에 대한 책을 쓰는 요리 전문가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옆집 남자의 이름은 대니얼.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토론토 시내에서 인력거를 끌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첫눈에 홀딱 반한 여자가 이웃집 유부녀란 사실을 알게 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 남자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예요!”


여자에게 사랑하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남자는 ‘선택’을 여자에게 떠넘겨버린다. 그는 대신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생애 최고의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여자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본다. 남자는 서두르지 않는 대신 그녀와 근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갑작스런 출연에 놀라 동네 수영장에서 아쿠아로빅 중에 오줌을 지린 여자에게 그는 결국 이런 고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30년 후면 내 나이는 58살이에요. 그러니까 30년 후에, 등대에서 만나 당신이랑 키스할래요. 2040년 8월 5일, 동부 시간으로 오후 2시. 그때까지는 나는 유부녀일 거예요. 하지만 결혼생활 35년이면 남편이 나를 많이 믿을 거고, 그때는 키스해도 죄책감이 생기지 않을 것 같네요.”


주제인 듯한 대사 … “새 것도 결국 헌 것이 된다”처음 비행기 안에서 여자가 고백했던 이쪽과 저쪽 사이에 끼는 ‘환승 공포’는 이 영화의 메타포다. 목적지점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있는 공항에서의 환승조차 두려워하던 여자에게 남자를 바꾸어 갈아타는 일은 고통 이상이다. 게다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 남자를 더 사랑해서 생긴 일이니 혼란스러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수영장에서 오줌을 다 지렸을까.


수영장 샤워장에서 여자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마치 이 영화의 주제인 듯한 대사가 샤워꼭지의 물처럼 줄줄 흘러나온다. 그중 하나가 “새 것도 결국 헌 것이 된다”는 말이다. 20대의 팽팽한 몸과 40, 50대 여자들의 늘어진 몸이 뒤섞인 샤워장에는 제모하지 않아 무성한 낱낱한 몸의 현실이 있을 뿐, 매끈한 포르노그라피와 에로티시즘 따위는 거세되어 있다. 그 풍경이 내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배우인 사라 폴리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나다의 여자 감독이다.


우리는 언제 혼란스러움을 넘어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게 될까. 내 경우, 언제나 사랑이 끝난 후에야 그 사랑의 시작을 겨우 가늠해낼 수 있다. 마고 역시 남자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후에야 그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삿짐을 싸서 떠나버린 남자가 그녀의 문 앞에 남긴 말은 ‘2040년 8월 5일, 2시’라는 문장 한 줄. 키스는커녕 손 한 번 제대로 맞잡은 적 없지만, 그녀는 짙은 회한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을 때조차 그들은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마고는 남편 루가 잠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익숙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리며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자신도 알고 있는 이웃집 남자의 이름이 나왔을 때 지독한 혼란스러움에 빠진다. 대니얼이 누구인가. 결혼 5주년 기념일 날, 기꺼이 리어커를 공짜로 태워준 친절한 이웃 아닌가! 마고는 누구인가! 그는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어서 지난 5년 동안 매일 아내의 샤워실 안에 차가운 물 한 컵을 머리 위에 끼얹는 농담을 해왔다. 언젠가 아내가 아무래도 샤워 꼭지가 고장난 것 같다는 말을 하면, 그게 자신의 장난이었다고 고백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일상이 된 사랑과 모험이 될 사랑,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걸까. 어떤 선택이 더 현명한 걸까. 아니, 질문을 바꾸는 편이 낫겠다. 친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남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개 우리는 그(그녀)에게 없지만, 있다고 믿었던 그 무엇을 사랑한 탓에 실패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결국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가슴이 아픈 건, 그 사람을 잃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게 준 시간과 마음 모두를 잃게 된다는 지독한 상실감 때문이다.


선택이란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하는 것선택하지 않는 인간은 비겁하다. 여자에게 모든 선택을 미뤘던 대니얼조차 마지막엔 그녀를 떠나는 선택을 한다. 나는 선택이 선택하지 않은 걸 감당해내는 것이란 걸 이젠 안다. 마고는 남편인 루를 떠났기 때문에 그가 부엌에 서서 요리하던 닭요리에 대한 향수를 평생 간직하고 살게 될 것이다. 부엌을 채우던 그 맛있는 냄새가 그녀를 때때로 공격할 것이고, 샤워를 할 때마다 문득 샤워 꼭지를 올려다보며 눈물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고는 결국 2040년까지 기다리지 않고 30년 후의 ‘미래’를 ‘현재’로 잡아당긴다.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경란의 에세이 ‘백화점’이 떠올랐다. 그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가구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구디자이너들이 그 물건을 사용할 사람의 행동패턴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거리에 대한 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한 ‘숨겨진 치수’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포옹이나 속삭임을 위한 친밀함의 거리는 15.2~45.7cm, 친한 친구간의 상호작용을 위한 개인적 거리는 0.45~1.21m, 공적인 대화를 위한 거리는 3.65m 이상.”


사랑을 위한 거리는 얼마인 걸까. 미래의 남편이나 아내가 반경 몇 km 안에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도 있다.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랑에 관한 많은 정의들을 떠올리게 된다. 끝없이 자문자답했던 질문들을 말이다. 사랑은 의지인가, 우연인가. 사랑은 타이밍인가.


이제 내가 조심스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사랑이 타이밍이 아니라, 타이밍 자체가 사랑이다. 삶보다 강한 꿈은 없듯, 시간보다 강한 건 세상에 없어 보인다. 샤워장의 늙은 몸들이 내게 했던 그 말이 종일 맴돌았다. 새 것도 결국 헌 것이 된다!


그녀들이 맞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들 옆에 있었다면 나는 이렇게 반문했을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갈까? 인간은 결국 죽는다. 그러나 죽는 걸 알고도 살아간다. 인간의 자기 기만은 놀랍도록 무심하지만 또한 정교하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헤어질 걸 알고도 우리는 사랑한다. 다시 한 번!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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