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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 방관, 식산은행 방해 뚫고 50년 5월 국회 통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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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호 21면

1950년 6월 5일 국내 최초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재무장관인 최순주 의장(서 있는 사람) 오른쪽으로 구용서 한은 총재, 하상용·윤보선 위원, 왼쪽으로 장봉호·홍성하·이정재 위원이다. 왼쪽 끝이 직전 재무장관이었던 김도연, 왼쪽 뒷줄에는 한은법 제정에 가장 소극적이던 송인상(오른쪽) 재무부 이재국장과 가장 적극적이던 장기영 한국은행 조사부장이 나란히 배석했다.

인간은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약 38주를 어머니 몸에서 머문다. 그 기간 중 언제부터를 인간으로 볼 것이냐는 어려운 문제다. 생물학적 기준과 법률적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낙태 문제를 두고 윤리와 법률이 충돌한다. 인간이 만든 법률적 생명체 즉, 법인(法人)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우리나라 상법(제172조)에서는 “회사는 본점소재지에서 설립등기를 함으로써 성립한다”고 못박고 있다. 주주 모집, 정관 작성, 대표 선임, 자본금 납입, 사무소 설치 등의 긴 과정을 마치고 법원에 설립등기를 한 순간부터 법적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달랐다. 최초의 한국은행법 시행령(제6조)은 “한국은행은 정부가 자본금의 출자와 적립금의 납입을 완료함으로써 설립된다”고 규정했다. 한국은행에게는 설립등기보다 자본금 납입이 존재의 근거였던 것이다(그러나 한국은행은 현재 무자본특수법인이다). 한국은행법 시행령을 준비했던 송인상 이재국장은 재무부에서 그 법을 제일 싫어했다. 조선식산은행 출신인 그는 김도연 장관만 물러나면 법안이 폐기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법제처 심의과정에서 계속 시간을 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 경제협력청(ECA) 법률고문 에른스트 프랭켈(Ernst Frankel)이 나섰다.


1948년 5월 출범한 제헌국회는 헌법 제정과 대통령 선출 등 역사적 소임을 마치고 50년 5월말 해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총선거 실시를 미적거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야당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제2대 국회가 여소야대로 운영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프랭켈이 압박했다. 이승만에게 정치일정을 지킬 것과 국회해산 전에 중요한 법률들을 빨리 처리하라고 독촉했다. 거기에는 한국은행법도 포함돼 있었다.


총선거 앞둔 국회의원들 표결 외면한국은행법은 송인상의 지연작전에도 불구하고 프랭켈의 독촉으로 법제처를 통과했다. 하지만 50년 3월 14일 국무회의에서 다시 고비를 만났다. 회의를 주재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들의 의견을 묻자 허정 교통부장관이 대뜸 “이 법은 정부에 권한이 없고 너무 금융기관 독재적인 경향이 있으니까 부당하다”며 재무부 직원들의 의견을 그대로 전했다.


당시 내각에서 허정의 발언권은 상당히 컸다. 한민당의 동료 의원들이 이승만 정부에 등을 돌리고 49년 2월 민주국민당(민주당)을 창당한 뒤 내각에 남은 유일한 여당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허정이 입을 열자 신태익 법제처장도 한마디 했다. 그는 법안에 문제가 없다고 이미 결재를 마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느닷없이 “금통위의 구성을 보면 실업계에서도 대표가 나오고 금융계에서도 나오는데 법조계에서도 대표를 넣어야 한다”는 개인의견을 펼쳤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대통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최 은행장 나왔지?”라고 물었다.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를 찾은 것이다.

1980년대 초 서울 남산의 ‘한남클럽’ 모임에 초대된 블룸필드 박사. 앞줄 왼쪽부터 전예용(5대 한은 총재)·신병현(12대 총재)·블룸필드·구용서(초대 총재)·김진형(3대 총재). 뒷줄 맨 왼쪽은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인 칼 밀러(한국명 민병갈) 쌍용투자증권 고문.

대통령은 최순주에게 “이것은 해럴드 레이디(Harold Lady)에게 물어본 것이지?”라고 물었다. 레이디는 이승만의 개인고문이었다. 공군 경리장교와 은행원 경력밖에 없는 그가 한국 국정운영에 깊이 간여하는 것은 문제였지만, 당시 그에게 물었다는 것은 곧 대통령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최 총재가 “네, 그랬습니다”고 하자 대통령은 “여러분, 이의 없지요?”라고 물으며 장관들을 쏘아봤다. 마치 ‘니들이 뭘 알아? 이건 내게 맡겨’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렇게 국무회의를 통과한 한은법은 3월 18일 국회로 회부된 뒤 또 장애물을 만났다. 주무부처인 재무부가 한은법 문제에 손을 놓은데다 조선식산은행이 수리수산자금 등 거액 대출을 미끼로 의원들을 쫓아다니며 반대를 종용했다. 그 결과 조선은행 직원들을 밤낮으로 피해 다니는 의원(조봉암), 만나면 딴청 하는 의원(이정래), 상임위 토론 때는 필리버스터를 하다가 표결에는 불참하는 의원(이재형) 등 천태만상이 벌어졌다. 결국 한민당 출신인 김도연 재무장관이 서상목 원내총무에게 한은법을 당론으로 통과시킬 것을 부탁했다. 문제는 표결인원이었다. 5월말 총선거를 앞두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속속 지역구로 내려가는 바람에 본회의 참석자들이 계속 줄고 있었다.


제헌국회 임기 마지막 달에 본회의 통과그나마 4월 들어 국회는 소위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정운수 일당이 “야당인 민국당의 김성수·조병옥·김준연 등이 남파간첩들과 정부 전복을 모의했다”며 선거 직전 ‘북풍공작’을 폈다가 거짓으로 들통 난 사건이었다. 이범석 총리가 퇴진하고 대통령이 발뺌하는 가운데 신성모 총리서리가 국회 단상에서 연일 집중타를 얻어맞았다.


그러니 의원들은 한은법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5월 5일도 아침에는 대정부 성토가 이어지다가 오후 들어 의석이 비기 시작했다. 참석자가 102명으로 줄어들어 재적의원 198명의 과반수인 99명에 가까워졌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윤치영 부의장이 서둘러 한은법을 표결에 부쳤다. 그리고 78명의 찬성으로 가결을 선포했다(법률 제138호. 반대 6, 기권 18). 그 순간 방청성에 있던 조선은행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으나 송탁성·김영휘·김경진 등 식산은행 임원들은 굳은 얼굴로 찬성의원들의 이름을 적기 바빴다.

1950년 6월 12일 선포된 한국은행 직원 선서문. 장기영·신병현 등 조사부의 내로라하는 명문장가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서문은 한국은행 안에서 힘의 중심이 업무부에서 조사부로 기운 것을 의미한다.

한은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한국은행의 설립등기와 출범기준에 관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부랴부랴 대법원 규칙 제1호로서 ‘한국은행 등기처리규칙(5월 23일)’을 제정했다. 한국은행 설립등기에 상법을 적용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국은행이 선례가 되어 대법원은 특별법인이 설립될 때마다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이런 비효율은 1973년 ‘특수법인등기처리규칙(대법원규칙 제514호)’이 제정되면서 해소됐다.


하지만 같은 날 재무부는 시행령을 통해 “한국은행은 정부가 자본금의 출자와 적립금의 납입을 완료함으로써 설립된다”는 또 다른 기준을 정했다. 그것은 설립등기를 법적 권한의 출발점으로 삼는 상법의 일반원칙과 달랐다. 한국은행 설립을 둘러싼 법원과 행정부의 처리방식이 달랐던 것은 중앙은행이 정부와 민간의 성격이 공존하는 미증유(未曾有)의 특수기관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나 한번쯤 겪는 혼란이었다.


한편, 한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일 때 재무장관과 조선은행 총재가 바뀌었다(4월 25일). 총선 출마를 위해 김도연 장관이 사퇴하고, 최순주 총재가 장관으로 이동하면서 구용서 이사가 총재직을 이어받았다. 이로써 구용서는 조선은행의 마지막이자 한국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는 것이 확실해졌다.


‘금수저’ 윤보선, 초대 금통위원으로 활동6월 5일 대통령은 구용서를 포함한 금통위원과 대리위원들을 임명했다. 대부분 조선은행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대리위원 김교철(훗날 조흥은행장)의 경우 아들 김정렴(재무장관)과 함께 2대가 조선은행과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조선은행은커녕 금융업 경험이 전혀 없는 비전문가도 있었다. 윤보선(제4대 대통령)이 그랬다.


윤보선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에는 원래 흥미가 없었다. 서울시장 직은 6개월, 상공장관 직은 1년 만에 사퇴했다. 청탁이 많아 성가시다는 이유였다. 그 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러자 6촌 형님인 윤영선 농림장관이 백수인 그를 금통위원으로 추천했다. 이승만은 임명장에 서명하면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윤보선은 끈기가 없어서 그것도 얼마 못할 것”이라며 혀를 찼다. 과연 윤보선은 6개월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옮겼다.


윤보선도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성의를 보였다. 금통위원으로 임명되던 6월 5일 오후 제1차 금통위 회의에 출석해 한국은행의 정관과 직제를 승인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6월 6일 재무부가 15억원의 자본금과 3억원의 적립금을 납입했다. 이로써 한국은행의 법인격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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