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서 명예살인 금지법 상·하원 만장일치 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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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살인 [名譽殺人]
주로 이슬람권에서 행해지는 관습. 집안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을 죽이는 행위.

파키스탄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던 명예살인이 이제는 법으로 금지된다.
현지시간 22일, 파키스탄 상원은 명예살인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지난 10월 6일, 하원에서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지 두 달 반만의 일이다.

개정안은 명예살인 피해자 가족이 용서하면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는 예외규정을 삭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즉, '명예살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명예살인 범죄자는 최소 징역 25년형에 처해지게 된다.

지난 7월, 명예살인 규탄 집회에 참가한 파키스탄 소녀가 피켓을 들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강가의 소녀' 포스터

파키스탄에서 명예살인 금지 요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키스탄의 샤르민 오베이드 치노이 감독이 명예살인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로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받으며 법안의 필요성이 논의됐고, 수상 직후 파키스탄에선 법률 개정안에 대한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 3월, 법안은 끝내 부결되면서 명예살인은 해결할 수 없는 '종교적 관습' 문제로 비쳐졌다.

파키스탄 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에만 300명의 여성이 명예살인으로 숨졌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건 올해 7월, 파키스탄의 SNS 스타 찬딜 발로치가 친오빠에게 명예살인을 당하면서다. 비난 여론이 거세게 들끓었고, 곳곳에서 명예살인 규탄 집회가 열렸다. 그간 멈춰있던 법률 개정안에 대한 움직임은 다시 시작됐고, 결국 상·하원 모두 만장일치로 법안은 통과됐다.

명예살인으로 숨진 파키스탄의 SNS 스타 찬딜 발로치

명예살인으로 숨진 파키스탄의 SNS 스타 찬딜 발로치

파르하툴라 바바르 상원의원은 CNN 인터뷰에서 "악순환이 드디어 끝나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어떠한 살인범도 '명예'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매나 부인, 어머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며 "사람을 죽이는 데에 명예는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에서 파키스탄의 성평등 수준은 전체 조사대상 145개국 가운데 144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명예살인뿐 아니라 성폭력 등 성차별 문제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날 파키스탄 상원은 성평등 수준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는 또 다른 법안을 통과시켰다. 바로, 강간범의 적발과 처벌이 용이하도록 DNA 검사를 의무화하는 법안이다.
그간 사법부는 성폭력 범죄에 대해 정황증거 만을 활용해왔는데, 앞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로부터 DNA 증거를 채취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최근 5년간 단 한 명의 성폭력 용의자에게도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만큼 앞으로 유죄 판결 가능성이 높아졌다.

파키스탄 의회의 이번 법안 가결로 여성들의 인권을 더욱 보호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여전히 고칠 부분이 많다"는 냉소적 시각도 존재한다.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의 샤르민 오베이드 치노이 감독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의 샤르민 오베이드 치노이 감독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의 치노이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법안은 그저 법률적 의미의 살인과 죽음만을 다룬다"며 명예살인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에 대한 지원 강화를 촉구했다.

박상욱 기자 park.lepremi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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