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당의 이념적 불모|고급인력의 진출 고무적인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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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안병영 <연세대교수·행정학>최근 사회민주당의 부위원장직에 현직 서울대학교 교수가 선임되어 관심 있는 이의 눈길을 끈바 있다. 그런가하면 지난달 31일 접수 마감한 통일민주당의 정책위원회 전문위원 공채에 박사5명과 석사 1백44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고급전문인력들이 몰려 새로운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의 경우 지식인들은 대체로 정당에 가까이 하기를 꺼려왔고 어쩌다 정치와 인연을 맺는 경우에도 으례 여당주변에서 맴도는 것이 상례였음을 상기할때 고급 두뇌의 야당 진출은 확실히 파격적인 데가 있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지성의 결여」와「정책의 절대빈곤」 에서 허덕이는 한국의 정당정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떨칠 수 없다.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정치의 전경에 나설 의사가 없는 대학교수들이 현직에 머무르면서 자신들이 이념적으로 선호하는 정당에 가입하여 정강의 작성이나 정책연구에 관여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일은 신념을 갖춘 지식인이면 응당 해봄직한 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법은 오랫동안 공무원·국영기업체 임직원과 더불어 대학교수의 정당 가입을 금지함으로써 지적 엘리트가 정치조직으로 진입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차단해 왔었다.
이제 이 멍에는 풀렸으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아직도 이성을 앞세운 정책 논의 대신에 적나라한 권력과 허위의식으로 충만된 황량한 정치마당으로 선뜻 나서기를 몹시 주저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그간 여야를 막론하고 정책의 연구·발전에 필요한 전문화된 정책 브레인을 충원하고 이들을 키우는데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적·물적 자원의 제약에 허덕이는 야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좀 낫다고 하는 여당의 경우도 당의 정책형성 능력은 그 조직동원 능력에 비해 크게 뒤진다. 따라서 정책 참모기구의 발전 정도를 척도로 할 때 한국정당의 후진성은 쉽게 포착된다.
그렇다면 한국정당의 이러한 정책 빈곤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이는 우선 이 나라 정치과정의 특징과 연관된다. 우리의 경우 이른바 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체제논쟁」이 항상 여야간의 불꽃 튀는 선차적 정치 쟁점으로 부각되었고, 그때문에 서구의 정치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사회경제적 쟁점은 항상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당은 자연히 스스로의 정책개발 능력을 키우는데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여야의 정상급 지도자 주변에는 빼어난 두뇌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미래지향적 정책연구보다 목전의 당리당략을 위한 상징 조작에 더 유용하게 쓰여졌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정당이 정책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길목을 막고 있는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다시 체제의 민주화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당이 보여주는 정책 빈곤의 보다 본원적인 원인은 오히려 그 이념적 불모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여야는 정치권력을 「가진 자」와「못가진 자」로 나뇔 뿐 양자의 정치 정향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양당을 지원하는 정치세력간에는 이념적이거나 사회계층적인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으며 그때문에 양당간의 정책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칠 계기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양당간의 두드러진 정책이념적 차이의 부재는 한국 정치과정의 동태성을 크게 약화시키며 정당의 인물 중심적 성격을 더욱 부각시켜 놨다. 그러나 지난 4반세기 동안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와 이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화, 특히 노동계층의 급격한 성장을 감안할때 보수양당제를 골간으로 하는 기존 정당체제의 적실성 여부는 심각히 논의해볼 문제다. 만약 장기적으로 한국의 정당체제가 보수·혁신의 두 축으로 재편되는 경우 이념적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책정당으로의 전환은 보다 급속히 진행될 것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상당수의 고급 두뇌들이 야당의 정책개발부문에 기여할 뜻을 표명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적지 않은 국민들이 수권정당으로서 야당의 정책 능력에 관하여 심각한 회의를 표명해온 것이 사실이다. 또 그것은 정당한 우려였다. 따라서 통일민주당은 이제 새로운 인적자원의 유입을 계기로 당의 정책적 하부구조를 개선하고 나아가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보다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들 고급두뇌들을 다시 몇갈래로 분극화시켜서는 안된다.
정책의 연구·개발은 협동적인 노력의 소산이며 따라서 이들의 전문능력은 당의 공동자산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정책 불모의 땅으로 유입되는 이들 전문인력들이 당의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 속에 손쉽게 매몰되거나 미래에 대한 꿈을 잃고 기술 합리성만을 숭상하는 단순한 기술관료로 전락하지 않도록 깊은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여당인 민정당은 이 기회에 야당에 고급 인력이 모이는 현상에 대해 곰곰이 되십어 볼 필요가 있다. 희망이 없는 곳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현상은 민정당의 정국 주도방식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함축한다. 많은 국민의 마음 속에 민주당이 흡족하지는 못할망정 아직도 유일한 정통 야당이며, 또 가능한 대체정부로 인식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정치의 기본논리가 벌거벗은 「힘의 논리」로부터 지성이 숨쉬는 「정책의 논리」로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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