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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2> 하원에서 발해까지…동양사 5천년의 베일을 벗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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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삼국지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고장이며 중국고대사의 중심지인 고도 낙양을 밟는 감회는 황하대장정중에서도 남다른데가 있다.
『낙양은 <구조의 고도>라 불려 왔읍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1왕조의 도읍이었읍니다』
낙양시문화국장을 지냈다는 백발의 장고시씨는 여러 왕조가 같은 왕성을 공유하고 낙양근교의 다섯 고성역·오도성이 낙양에서 만났다하여 『오도회낙』이란 말을 썼다.
장씨에 따르면 낙양의 역사는 주이전에 하·상(은)의 고대중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BC770년에 주가 낙양에 도움을 옮겼다. 그 뒤에 후한·위·서진·북위·수·당·오대(후당·후진등) 등 아홉왕조에 걸쳐 통산 9백34년간 70명의 황제가 영화를 누린 왕성의 땅이었다.
낙양시는 현재 하남성의 직할시로서 인구95만, 그중에 시내인구 56만명으로 황하지류 낙수를 앞에둔 근대적 도시다.
북쪽을 보면 아득히 정주까지 약2백km에 걸친 망산산줄기가 이어진다. 황하는 그 망산의 북쪽에서 동으로 향해 흐른다. 시내에서 약30km의 거리다. 남쪽으로는 용문산, 그리고 오악의 중심 중악이 있는 숭산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이 땅도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병가필쟁의 땅이었다.
눈아래 넓은 길 중주로가 뚫려있고 길가에 3, 4층의 건물이 늘어서 있지만 키 큰 가로수에 휩싸여 마치 숲속의 도시같다. 녹색이 풍성하고 밝은 인상이다. 하지만 고도의 분위기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아쉽다. 『무엇이든지 다 땅속에 잠들어 있지요.저 기 공원이 보입니다.』 중국국제여행사직원인 안내인의 말. 『저 공원은 왕성공원으로 주의 왕성이 있던 곳이며 그 바로 동쪽에는 수당고성, 그리고 시내에서 10km쯤 동쪽 백마사가 있는 근처에는 한위와 북위의 왕성터가 있습니다. 모두 전화에 불타서 지상엔 아무것도 안남아 있읍니다.』
한때는 왕성안에만 10만여호의 인가에 1천3백67개에 이르는 사원이 즐비했던 대도읍이었다. 그러나 백리밖에서도 보였다는 웅대한 9층탑을 가진 영령사를 비롯, 온갖 옛자취는 이제 시교외에 간간이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에서나 상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현재 남아있는 고적은 망산의 고분군, 백마사, 관림(삼국지의 관우묘) 정도다.
그 중에 백마사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한뒤 최초로 건립되었다는 유서깊은 절로 후한시대인 서기68년에 창건되었다 한다.
백마사는 시내 동쪽 10km의 거리에 있다. 중주로를 벗어나자 이미 시가지는 끊기고 밭이 펼쳐진다. 가뭄으로 옥수수의 성장이 아주 나쁘다. 정상이라면 사람의 키보다 큰데 곳에 따라서는 무릎높이밖에 안되는 것들도 있다.
차창 왼쪽에 망산구릉이 아득히 뻗어있다. 그 능선의 거대한 여러 봉우리가 보인다.
『역대 왕릉입니다. 주대부터 황제들은 망산에 장사지냈습니다. <소항(소주와 항주)에 태어나 북망에 묻히고 싶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망산에 묻히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백마사를 세운 후한의 명제, 북위의 효문제등의 능은 모두 저 산에 있읍니다. 워낙 많아서 왕릉의 절반이상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마치 산같은 그 왕릉들을 옆으로 바라보며 포플러 가로수길을 30분쯤 달렸을 때 앞폭에 우뚝 솟은 탑이 보였다. 제운탑이라 하는데 높이35m. 4각형 13층으로 당대에 세워진 것인듯.
낙양의 현존 건조물중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추측된다. 차는 제운탑을 오른쪽으로 보며 백마사산문 앞에 접근했다. 백색 우조마 두마리가 문전에 서있다.
옛날에 인도의 승려가 불경을 백마 등에 싣고 중국에 왔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후한의 명제가 인도에 사자를 파견하여 불경을 백마에 싣고 온 것이 백마사라는 이름의 유래다.
산문을 들어서자 천왕전·대불전·대웅전·접인전·비노각과 다섯채의 건물이 남에서 북으로 일직선을 이루고 늘어섰다. 모두 오래지 않은 명대의 건축으로 중국의 석원(불교발상지)또는 조정(최초의 사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고색은 느낄 수 없다. 안에 보이는 불상도 오랜 것이 아니었다.
『이 백마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중국불교의 상징입니다. 최초의 사찰일뿐만 아니라 절의 역사를 보면 불교가 이 나라에서 어떠한 시대의 흐름속에 있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중나온 낙양시정부 민족종교사무위원의 말.
확실히 백마사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불사가 거쳐온 운명이 단적으로 떠오른다.
사찰의 역사는 파괴와 재건의 되풀이였다. 창건된지 약백년후인 후한말, 내란으로 최초의 가람은 불타고 그 뒤 4세기초에 흉노의 침략으로, 6세기 중반에는 북위멸망의 혼란속에서 사찰은 완전히 타버렸다. 당대에 들어와서 칙천무후시대에는 3천명의 승려를 포용한 황금시대를 맞았으나 8세기중반에는 안사의 난으로 이 역시 소실되었다.
그 뒤에도 명대·청대, 그리고 국공내전과 전란이 일어날 때마다 파괴와 중건을 되풀이해 왔으나 기본적으로 사찰의 규모는 명대의 것을 이어받고 있다.
현재의 백마사 총면적은 4만평방m. 명대의 사령제한면적에 해당한다.
역사의 거친 물결에 번롱당해온 백마사의 마지막 격랑은 문화대혁명이었다. 승려의 태반은 절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업에 종사했다.
이때 사찰의 모든 종교활동은 중지되었다. 재개된 것은 약10년후인 1982년. 그 뒤에 차츰 승려도 절로 복귀하여 지금은 72세의 방장을 필두로 승려수도 60명을 헤아린다.
승려들의 생활상을 수좌 석홍천씨에게 물었다. 현장삼장과 같은 하남성언수현 출생으로 당년 60세. 활달한 인상이다.
-하루의 일과는?
『기본적으로 하루 5회의 동행이 있습니다. 새벽 4시와 저녁8시. 거기에다 3회의 식사전에불경을 읽습니다. 그 뒤엔 백마사는 선종사찰이기 때문에 모두좌선을 합니다.』
종파가 성립되기 이전에 건립된 백마사도 원대무렵부터 선종(임제종)의 사찰이 된 모양이다. 현재는 좌선당이 아직 재건되지 않아서 모두 각자의 승방에서 좌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찰의 경영은 국가보조입니까.
『아닙니다. 관광수입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국가의 보조는 반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작년도에 중국인 17만명, 외국인 3만명이 절을 찾아왔읍니다. 그 입장료수입, 매점 매상액이 20만원(한화 약4천만원) 정도입니다. 승려의 생활이나 소규모의 사찰수리는 그것으로 충분하니까요』
석양이 깔리는 경내에서 스님들이 예불을 하고 있다. 돌을 다듬어 깔아놓은 경내의 길을 옆드려 기어다니는 특이한 모습이다. 오체투지례라는 것.
오체투지례는 오늘날 티베트불교권뿐이며 중국의 대승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도 여기엔 티베트불교와의 교류가 남아 있다는 얘기인가.
언제 끝날지 모르게 마치 아득한 심연으로 깊이깊이 빠져드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예불광경은 이상하면서도 무척 감동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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