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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디테일의 재발견] '비밀은 없다'의 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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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174호) ‘바그다드 카페’(1987, 7월 14일 재개봉, 퍼시 애들론 감독)에 이어 이번에도 꽃 이야기다. 텍스트는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6월 23일 개봉)다. 이 영화에서 꽃은 엄마 연홍(손예진)과 딸 민진(신지훈)을 이어 주는 매개체이자. 민진과 친구 미옥(김소희)의 공간을 채우는 테마이기도 하다.

`비밀은 없다` 스틸컷

`비밀은 없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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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부. 집에 홀로 남은 연홍의 딸 민진은 무료한 듯 마당에서 그네를 탄다. 이때 전화 한 통이 온다. 휴대전화 바탕 화면에는 꽃 이미지가 뜬다. 이 꽃은 민진의 노트 표지의 꽃 이미지와 같고, 그가 항상 듣는 조앤 페이의 앨범 ‘와일드 로즈 힐(Wild Rose Hill)’ 이미지와도 이어진다. 이 아이에게 꽃은 언제나 곁에 있는 존재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그러는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치인 아버지(김주혁)을 둔 탓에, 그의 엄마는 아빠의 내조에 바쁘다. 대신 꽃이 마치 부적처럼 아이와 함께한다.

아이가 꽃과 항상 함께하는 건 따지고 보면 엄마 연홍의 영향이다. 민진이 실종된 후 종찬과 연홍은 딸의 방을 뒤진다. 이때 민진의 방을 자세히 보면 온통 꽃이다. 책상엔 꽃병과 꽃이 있고, 벽지나 이불은 물론 의자에도 꽃무늬가 있다. 시계와 전등갓마저 그렇다. 아이의 방을 꾸며 주는 사람은 엄마이고, 엄마는 아이에게 어릴 적부터 꽃을 선사했던 것이다. 초반부를 다시 떠올려 보자. 아이가 전화를 받고 나간 후 시간이 흘러 밤이 된다. 연홍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 안엔 꽃 모양 장식품이 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엄마와 딸이 ‘꽃’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셈이다(연홍의 방도 꽃과 꽃무늬로 가득하다). 그래서 연홍이 민진의 방에서 노트와 앨범을 발견하는 장면은, 마치 그가 자기의 흔적을 밟는 것과 같다. 이후에도 연홍은 끊임없이 ‘꽃’을 발견하게 된다.

모녀는 평행 관계다. 연홍은 젊은 시절 가수를 꿈꾼 적 있고, 민진은 미옥과 함께 밴드를 만들었다. 연홍은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 밝혀지며 ‘외지인’ 취급을 당하고, 민진은 학교에서 ‘왕따’다. 하지만 행동은 다르다. 연홍은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민진은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꽃으로 상징되는 조앤 페이의 음악 세계이며, 미옥과 깊은 감정과 슬픔을 나누는 찔레꽃(와일드 로즈)이 만발한 숲속의 공간이고, 음악 작업을 하는 꽃무늬로 장식된 아지트다. 민진은 아버지와 내연 관계를 맺은 손소라(최유화)에 대해 “치마를 살랑살랑, 미친 년 꽃다발 나가신다”라고 표현하고, 깊은 슬픔을 느낄 땐 머리 위에 꽃 한 송이를 올려 놓는다. 아이에게 꽃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DNA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정체성이고,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연홍이 딸의 장례식에서 왜 그렇게 화려한 옷을 입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현란한 꽃무늬가 있는 그의 옷은 딸에 대한 추모의 의상으로 가장 적절하며, 이때 그의 표정은 결연하면서도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하다. 이후 복수를 마친 연홍은 숲속으로 간다. 그곳엔 민진의 추모 공간이 있다. 연홍은 조앤 페이의 CD를 연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거기엔 민진이 쓴 글씨가 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친구 옥이에게 -민진.” 이때 저쪽에서 미옥이 걸어온다. 연홍은 미옥에게 “민진아!”라며 달려가 끌어안는다. 미옥은 엉엉 운다. “울지 마…, 추웠지? 엄마야, 민진아. 우리 딸…, 괜찮아. 울지 마….” 그리고 미옥에게서 엄마에 대한 민진의 마음을 듣는다. “엄마는 멍청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자기가 지켜 줘야 한다고 그랬어요….” 두 사람 주위엔, 하얀 찔레꽃은 모두 지고 붉은 열매가 열려 있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프리랜서 8년차. 매년 개봉하는 우디 앨런 영화가 유일한 인생의 낙.

*매거진M 176호(2016.08.12-2016.08.18)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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