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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시간이 멈춘 한옥마을, 그 속에 숨은 반전 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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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에 새 옷 입힌 익선동

종로 빌딩 숲 사이 작은 한옥섬에 사람 몰려
경양식1920·열두달 등 개성있는 맛집 가득
인스타그램 #익선동 해시태그만 5만4000개

100년 된 한옥에서 수제맥주 마시거나
80년대 풍 슈퍼에서 레게음악·가맥 즐겨
익선동에만 있는 소년·소녀커피도 인기

낡은 기와, 깨진 벽돌 등 익선동 한옥 마을엔 옛 서울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낡은 기와, 깨진 벽돌 등 익선동 한옥 마을엔 옛 서울의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인 지하철 종로3가역 4번 출구 맞은편 사잇길에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세상과 마주한다. 자동차는커녕 사람 두서너 명이 함께 지나가기조차 힘들 만큼 비좁은 골목이 나타난다. 그 골목 양켠엔 빛바랜 한옥이 빼곡하게 서있다. 종로구 수표로 28길(익선동 166번지), 요즘 뜬다는 익선동 한옥마을이다. 빌딩 숲 사이에 있는 이 조그만 한옥섬에 최근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인스타그램엔 익선동 해시태그(#익선동)가 달린 사진 개수만 5만4000개가 넘을 정도다. 직선거리로 불과 수십 미터 길이의 이 작고 네모난 마을에 뭐 대단한 볼거리라도 있는 걸까. 구불구불 4개의 골목길을 따라 익선동 한옥마을을둘러봤다.

오래 돼 빛바랜 동네, 새로움을 입다

익선동에 외지 사람이 모여든 건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진 서울 토박이에게조차 낯선 이름이었다. 걸어서 20분 떨어진 북촌이 인기를 끌며 사람들로 북적일 때도 익선동은 소외돼 있었다. 태생이 달라서였을까. 처음부터 고급 주택단지로 조성된 북촌과 달리 익선동은 1920년대 후반 서민을 위한 주거단지로 만들어졌다. 북촌 한옥 한 채 크기는 대략 100~200㎡(30~60평) 정도지만 익선동은 그 절반인 49.6㎡(15평)에 불과할 정도로 협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2004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며 집주인들은 최소한의 보수만 했다. 그마저 여의치 않는 집은 사람이 떠나 빈 채로 방치돼 있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동네도 비슷한 걸까. 2014년 10년을 끌어온 재개발이 무산된 게 오히려 기회가 됐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새로운 형태의 공간으로 속속 탈바꿈하면서 동네가 달라졌다. 한옥이라는 틀에 새로운 콘텐트가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옛 서울의 정취를 찾아 온 사람들을 맞이한 건 이태원·홍대보다 핫한 수제맥주집과 카페, 그리고 서촌에서 볼 수 있는 아담하고 정겨운 경양식집이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변화의 물꼬를 튼 건 ‘익선다다’. 브랜드 기획자 박지현(28)씨와 공간 기획자 박한아(32)씨가 익선동에 ‘새로운 아날로그’ 옷을 입히겠다며 의기투합해 만든 프로젝트팀이다. 박지현씨는 “주거 지역으로 묶여있는 북촌·서촌과 달리 익선동은 현재 상업지구로 지정돼있어 까딱 잘못하면 한옥이 전부 사라질 수도 있었다”며 “개성없는 상업건물이 들어설 생각을 하니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래 익선동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이 동네를 처음 와봤을 때 할머니집에 온 것 같은 푸근한 느낌이 좋아 그걸 다음 세대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들은 갤러리겸 카페 익동다방을 시작으로 레스토랑 열두달·경양식1920 등을 기획 운영한 데 이어 다음달 문을 여는 부티크 호텔을 준비중이다.

익선동 한옥 마을의 전체 둘레는 400m 정도에 불과하다.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진 골목을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작고 좁은 골목이지만 골목마다 느낌은 사뭇 다르다. 종로 3가역 4번 출구를 기준으로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변해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개발된 첫번째 골목은 이미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1월 문을 연 익동다방을 시작으로 올 4월 오픈한 수제맥주집 ‘크래프트 루’까지 10개의 가게가 있다. 대부분 먹거리를 파는 곳이지만 가게 하나하나 개성이 넘친다. 100년 된 한옥에서 마시는 한국 수제맥주부터 유기농 식재료로 차려낸 건강식, 좋은 향기가 가득한 한옥에서 마시는 홍차 등 다양하다. 두 번째 골목은 개발이 절반 정도 진행됐다, 본래 있던 한옥 게스트하우스들이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바뀌는 중이다. 다른 골목 한옥보다 비교적 공간이 넓어 대부분 시원하고 확트인 느낌을 준다. 세 번째 골목은 공사가 한창이다. 지금은 영화 카페 한 곳만 운영중인데 다음달엔 프랑스 가정식 전문점과 수제맥주집이 문을 열 예정이다. 네 번째 골목의 낡은 한옥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트렌드를 찾아 온 사람에겐 그냥 지나쳐갈 법한 골목이지만 익선동 특유의 소박하고 옛스런 정취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골목으로 꼽힌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한옥에서 맛보는 반전 요리

1980년대 경양식집 분위기를 재현한 레스토랑 ‘경양식1920’ 내부.

1980년대 경양식집 분위기를 재현한 레스토랑 ‘경양식1920’ 내부.

한옥에서 꼭 한식만 먹으란 법은 없다. 익선동 가게들은 한옥이라는 틀은 유지하면서 그 안에 각자 새로운 콘텐트를 담았다. 식당도 그런 반전의 매력이 있다. ‘동남아’라고 쓰인 간판을 따라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면 깨진 장독대와 옛날 욕실에 있던 타일이 놓인 마당이 보인다. 영락없이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집이다. 그러나 이곳에선 태국 현지인 요리사가 태국 요리를 만든다. ‘한옥에서 다른 나라 음식을 파는 건 어떨까’라고 생각하던 박지현씨가 자신이 좋아하는 태국 요리를 담았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이태리 총각’ 익선동점(서촌에 1호점이 있다)은 투명한 천정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이 한옥의 나무 기둥과 어우러져 따뜻한 분위기를 낸다. 다른 가게에 비해 매장이 넓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는 게 이곳의 장점이다. 쫄깃한 도우 위에 치즈와 토핑을 듬뿍 올려 동그랗게 말아낸 총각 피자가 유명하다.

‘경양식1920’은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갔던 그 시절 경양식집 그대로다. 빨간 벽돌 너머 보이는 가게 안은 복고풍 소품이 옛스런 분위기를 더한다. 메뉴도 돈까스와 함박스테이크 2종류뿐이다. 한 그릇에 리소토와 돈까스(또는 함박스테이크) 샐러드, 달걀후라이를 담아낸다. 익선동 식당 중 대기 시간이 가장 긴 곳으로 주말엔 1시간 이상 기다리는 게 예사다. 물론 잘 차려입고 가야하는 예쁜 맛집만 있는 건 아니다. 따뜻한 바닥에 편히 앉아 쌀밥 한 숟가락 뜰 수 있는 한식집도 있다. 알이 꽉 찬 게로 담근 간장게장을 파는 ‘골목 간장게장’은 장사가 잘 돼 지난해 한옥마을 쪽으로 확장해 한옥마을 골목과 맞닿게 됐다.

어떤 집이든 가성비가 좋은 게 익선동 식당의 장점이다. 간장게장도 1인분에 1만8000원이면 맛볼 수 있다. 식당 대부분 생긴 지 얼마 안된 탓인지 서비스 면에서 좀 어설프긴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것도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익선동 한옥마을 가게는 저마다 개성있는 콘텐트를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을 한눈에 설명해주는 간판 디자인도 예외가 아니다.

영화 한 편 즐기는 한옥 카페

깔끔하게 재단장한 한옥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이어라’.

깔끔하게 재단장한 한옥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 ‘이어라’.

익선동 한옥 골목을 걷다보면 나오는 한옥 카페는 익선동 골목 투어를 한다면 꼭 들러야 할 필수 코스다. 프랜차이즈 카페가 없는 만큼 어느 곳에 들어가도 주인만의 스타일이 담긴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분위기야 제각각 개성이 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커피를 원한다면 빈티지 카페 ‘식물’을 추천한다. 더치커피에 알코올과 우유를 넣은 소년커피, 그리고 초콜렛을 넣은 소녀커피가 인기다. 더치커피 맛집으로 소문난 솔내음은 한옥 안에 커피콩 볶는 냄새가 풍긴다. 진한 커피 대신 달콤한 디저트가 먹고 싶다면 한달 전 게스트하우스를 카페로 바꿔 문을 연 ‘카페 엘리’의 조각 케이크가 있다. 새콤한 베리를 넣은 그린티티라미스가 인기다. 카페 엘리에선 대청마루에 앉아야 한옥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마카롱·다쿠아즈 등 프랑스 디저트 전문점 ‘프앙디’은 3주 전 문을 열었다. 가운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디저트를 진열·판매하는 곳과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좌식 소파가 있는 공간으로 나뉜다.

시간 여유가 있거나 가만히 앉아있는 걸 못견딘다면 영화 카페 ‘엉클비디오타운’을 추천한다. 지난해 퇴직한 50대 주인과 아들이 함께 운영하는데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는 무비홀과 차를 마시는 카페홀으로 나뉘어있다. 무비홀에서는 다시 봐도 좋을 영화를 기준으로 주인이 직접 고른 영화 리스트 중에 선택할 수 있다. 11 · 12월엔 E.T · 레옹 · 쉰들러리스트 · 타이타닉 · 러브액츄얼리 · 위대한개츠비 · 냉정과열정사이 등을 볼 수 있다. 지난달 문을 연 카페 ‘이어라’는 개화기 스타일의 한복과 1980년대 교복 · 교련복을 빌려준다. 카페는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이후엔 한옥 전체를 대여해주는데 요즘같은 연말 이색 파티 장소로 인기다.

한옥은 술 한 잔 하기에도 좋다

빛바랜 한옥에 수제맥주·피자·경양식 같은 개성있는 콘텐트가 담기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빛바랜 한옥에 수제맥주·피자·경양식 같은 개성있는 콘텐트가 담기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한옥에서 마시는 술맛이 궁금하다면 익선동은 반드시 가야하는 곳이다. 특히 어둠이 내린 한옥마을 골목에서 맛보는 맥주 맛은 이색적이다.

100년된 한옥에서 맥주를 맛볼 수 있는 수제맥주집 ‘크래프트 루’는 맥주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입소문난 곳이다. 비어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는 주인이 한옥이라는 공간에 걸맞게 한국에서 양조된 수제맥주를 판다. 앞서 소개한 카페 식물은 저녁에도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해가 저물면 은은한 간접 조명이 가게를 비춰 낮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바뀌기 때문이다. 커피 대신 칵테일과 와인 등을 판다. 진일환 대표는 “요즘은 국내에서도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서도 한 병 가격이 2만5000원부터 있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만원 한 장을 맥주와 간단하게 옛날식 먹거리를 맛볼 수 있는 재미있는 공간도 있다. 익선동의 명물 ‘거북이슈퍼’는 과자 · 음료수 · 담배 등을 파는 작은 슈퍼다. 생김새나 파는 것들 모두 80년대 시골 슈퍼를 떠올리는데 특히 명태 · 오징어 · 쥐포 등을 연탄불에 구워먹는 옛날 가맥(가게에서 먹는 맥주)이 유명하다. 수제맥주와 가게 안에 울리는 레게음악이 가맥과 꽤 잘 어울린다.

학창 시절 학교 앞 분식집에서 내주던 초록색 그릇에 담긴 빨간색 떡볶이를 파는 ‘럭키슈퍼’에선 맥주는 꼭 주문해야 한다. 단골 김설아씨는 “맥떡(맥주+떡볶이)을 먹으면 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매콤달콤한 떡볶이와 시원한 맥주가 찰떡궁합이다”고 말했다. 다만 익선동 술집은 인근이 주거 지역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가게가 밤 11시면 문을 닫는다.

글=송정 기자, 오준엽 인턴기자 song.jeong@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 각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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