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과 사람] “해석되지 않은 날 것 … 어른이 동화 읽을 이유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2면

│세계가 인정한 광고제작자 김정아
차 외관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 자동차 광고가 있다. 차창 밖으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전부다. ‘쏘나타는 원래 그렇게 타는 겁니다’라는 문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자동차 광고인 줄 깨닫는다. 이 광고를 제작한 사람은 김정아(43) 이노션 월드와이드 제작센터장이다. 김 센터장은 세계 주요 광고제 심사위원을 도맡는 인정받는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ECD)다. 올해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캠페인브리프’가 선정한 가장 주목받는 아시아 광고제작자 톱2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노션 월드와이드 김정아(43) 제작센터장은 “삶의 디테일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올 가을 들어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책을 다시 꺼내 읽고있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이노션 월드와이드 김정아(43) 제작센터장은 “삶의 디테일을 담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며 “올 가을 들어 어린시절 읽었던 동화책을 다시 꺼내 읽고있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끊임없이 창의적 경험 쌓아야 하는 광고인
최근엔 동화 속 풍자 찾아내며 영감 얻어
호기심 생기면 날 잡고 폭식하듯 읽는 편

-제작센터장은 무슨 일을 하는 건가.

“농구로 치면 플레잉코치(선수 겸 코치) 같은 역할이다. 제작물을 만드는 현업 일을 하면서 다른 제작팀 아이디어를 리뷰하고 조직을 꾸려간다. 바쁘기는 하지만 현업을 계속 하며 촉과 감을 놓치지 않아야 관리자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최근에 또 새로운 팀을 하나 꾸렸다고 하던데.

“기존 매체 광고가 아닌, 기술이나 뉴미디어를 활용한 아주 새로운 형태의 크리에이티브 작업을 하는 팀이다. 팀이름도 ‘크리에이티브 알파’다. 기존 광고에서 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이다. 이런 작업에 관심 있는 사내 직원들을 대상으로 두 달 동안 심층 인터뷰를 해서 팀을 꾸렸다. 아트디렉터부터 기획·영업·테크니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직급도 없앴다. 이 팀에서는 서로를 모두 이름으로 부른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의 기준이 궁금하다.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 좋다. 개인의 취향은 없어지고 다수의 취향만 남아있는 시대다. 뭘 좋아하는지 물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보다 ‘요즘 이게 유행’이라는 말만 돌아온다. 정작 자신이 뭐에 끌리는 지, 다시 말해 나만의 유행을 모르는 것 같더라. 하나 더 꼽자면 좋아하는 건 나와 다르지만 대신 싫어하는 건 나와 비슷한 사람. 좋아하는 게 다른 사람을 곁에 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싫어하는 게 같으면 뭔가를 결정하거나 의견을 매만질 때 트러블이 적어서 같이 일하기 편하다.”

-요즘 나만의 유행으로 삼은 것은 무엇인가.

“출장 갔다 올 때마다 블록을 사온다. 늘 항상 뭔가를 만드는 직업인데, 정작 손끝으로 실제 ‘만들기’를 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선이나 건물, 프라모델 같은 것들을 만들다보면 땀이 날 정도로 집중이 된다. 지난 여름에는 주말마다 치즈 만들기를 했다. 이렇게 다양한 걸 많이 시도하는 성향이다. 단기간에 깊이 파고들다가 갑자기 싫증이 나면 다른 것으로 넘어간다. 어렸을 때는 쉽게 싫증내는 게 단점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 오히려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거나 읽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데 몸을 써서 체득한 것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경험을 수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크리에이티브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는 모양이다.

“광고에 필요한 창의성은 목적이 뚜렷하다. 그저 새롭고 재미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광고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크리에이티브니까. 광고주 니즈를 정확하게 알려면 질문을 잘 던지는 게 정말 중요하더라. 그래서 일 시작하기 전에 되도록 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정보를 모은다. 아이디어라고 하면 골방에서 불현 듯 떠오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 경험치는 물론 다른 사람의 경험치를 늘어놓고 얘기하다보면 확장이 된다.”

-독서도 창의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거론된다.

“어떤 것이든 다 도움이 된다. 다만 ‘이렇게 하면 창의력이 높아진다’는 류의 자기 계발서는 빼고(웃음). 솔직히 꾸준히 책을 읽는 건 (책을 읽겠다는) 강박이 있지 않으면 힘들다. 나는 연휴 며칠을 할애한다든가, 한 달에 하루 이틀 날을 잡아서 폭식하듯 책을 읽는다. 주제는 그때그때 다르다. 모로코 출장에서 본 염색하는 풍경이 마음에 박힌 뒤엔 염색 기술이나 염색 컬러의 역사 같은 책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염색 기술과 문양에 영향을 끼친 이슬람 문화까지 읽기가 확장되더라. 정말 배고플 때 음식이 맛있듯, 뭔가 궁금하고 알고싶을 때 읽은 책들이 재미있다. 오래 잊혀지지 않고 기분 좋게 배를, 아니 머리를 부르게 해준다.”

-요즘에 고픈 주제는 무엇인가.

“가을 들어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나 전시 등 새롭고 트렌디한 것만 찾다보니 거꾸로 아주 예전에 봤던 걸 지금 다시 보면 어떨까 싶었다.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계몽사의 50권짜리 전집 동화책을 떠올렸다. 아무리 찾아도 절판돼서 이솝우화부터 먼저 주문했다. 찾아보니 미야자와 켄지의 『주문이 많은 요리점』처럼 어린이를 위해 쓰였지만 어른스러운 화두를 담은 동화책이 많았다. 손님이 요리의 재료가 된다는 무서운 설정인데, 마흔이 넘어 다시 읽어보니 문명 비판적 시각과 풍자가 여기저기 배어있어 새로웠다.”

-어른에게 동화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독서를 지향하지만 편향적인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요즘 우리는 이야기의 디테일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 다른 이의 삶의 지혜를 압축된 형태로, 그것도 속성으로 읽어 파악하려고 한다.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대가들의 조언은 물론 도움이 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평균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답답한 교과서 같기도 하다. 트렌드와 처세를 학습하는 것보다 삶의 여러 모습을 담은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다. 누군가의 시각으로 해석되지 않은 날것의 이야기를 직접 느끼고 스스로 깨달을 때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

-SNS 등에도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책을 꼭 읽어야 할까.

“뭐든지 넓어야 하는 시대에 깊이를 갖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천천히 책읽기다. 나한테 활자는 ‘읽는다’와 ‘훑는다’ 두 가지로 나뉜다. 읽을거리가 넘치지만 대부분 그저 훑는 것에 가깝다.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를 통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천천히 한 조각씩 떼어 간직하는 행위다. 짬나는 시간에 틈틈이 하는 것은 독서가 아니다. 일부로 시간을 내어 다른 것을 하지 않고 온전히 책에 바치는 시간이어야 한다. mp3 파일의 음악은 다른 것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지만 LP는 걸어두고 시간을 내어 듣는 음악인 것처럼 말이다.”

김정아가 추천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 4권

주문이 많은 요리점 담푸스
미야자와 켄지 저, 김난주 역 1만800원

허기진 두 명의 사냥꾼이 외딴 숲 속 식당을 찾는다. 식사 전 몸을 씻고, 오일을 바르라고 끊임없이 손님에게 주문을 하는 이 수상한 식당은 알고 보니 손님이 요리의 재료가 되는 무시무시한 식당이다. 어린 시절에는 이 기괴하고도 우스꽝스런 이야기에 매료되었는데, 마흔이 넘어 다시 읽어보니 작가의 문명 비판적 시각과 풍자가 숨어있다.

옹동스 예담
권윤주(스노우캣) 저 1만4800원

엄밀히 말하면 동화가 아니라 웹툰이다. 매주 업로드를 꼬박꼬박 기다리며 읽고 있는데 단행본으로 묶여나와 반갑다. 두꺼운 종이에 수채화처럼 그려진 그림들을 넘기다 보면 만화라기 보단 어른을 위한 동화 같다. ‘나옹이’와 ‘은동이’ 고양이 두 마리와의 소소한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고양이는 행복을 미루지 않는다는 글귀가 마음을 콕콕 찌른다.

그림형제 동화전집 현대지성
그림형제 저, 아서 래컴 그림, 김열규 역 2만5000원

총 1064페이지에 달하는, 210편의 그림형제 동화를 모두 모아둔 일종의 완결판 같은 책이다. 20세기 3대 일러스트레이터라 꼽히는 아서 래컴의 삽화만으로도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다. 그림형제가 수집한 민담동화의 원작 그대로가 실려 있어 조금은 잔혹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이용 동화와 비교해 읽어보면 참 흥미롭다.

북유럽 동화집 계몽사
계몽사·이규식 저 e북 4500원

70~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대부분이 기억하는 50권짜리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다. 북유럽 동화집은 50권 중에 시각적으로 가장 나를 매혹시켰다. 자작나무 가득한 숲과 하얀 눈, 검푸른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 등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e-북으로 만나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