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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SUNDAY 사설

세계가 놀라는 촛불혁명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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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라고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투명사회를 대변하는 IT(정보기술) 천국인 한국에서 벌어진 국정 농단과 국기 문란, 헌정질서 파괴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다른 사실에 더 놀라고 있다. 국가원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혁명적 물결이 유리창 한 장 깨지는 일 없이 그토록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데 놀라고 있다. 국가적 폭력성과 시민적 성숙함이 불가사의하게 공존하는 한국 사회를 세계인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검찰이 입증을 99% 자신한다는, 최순실·안종범·정호성 3인의 혐의 내용만 봐도 박근혜 정부는 정부라기보다 조폭 집단에 더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 기업인들을 겁박해 기부금 아닌 기부금을 뜯어내고, 자신들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공직자들을 갖은 수를 써서 몰아냈으며, 인사와 부동산 대책 등 국가 기밀이 담긴 정보를 사전에 국정과 관련 없는 민간인에게 넘겨줬다. 국민들은 그 배후에 대통령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지율 4%의 대통령은 퇴진을 거부하고 있고 대통령을 비호하는 정치권의 호위무사들은 참람한 궤변으로 국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비정상을 바로잡기 위해 국민들이 광장에 모였다. 진눈깨비가 내려 체감온도가 뚝 떨어진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광화문광장과 전국 방방곡곡을 밝힌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바람 불면 촛불도 꺼진다”는 한 집권당 의원의 ‘망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토요 촛불집회 5주째를 맞은 어제(26일) 서울 150만 명을 포함, 전국적으로 190만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다.

이번 촛불은 그 어느 때의 촛불과도 다르다. 종이컵을 끼운 초의 모습은 닮았지만 그 종이컵 안에는 과거처럼 분노만 담긴 게 아니다. 희망도 함께 담겼다. 대한민국을 농락한 주범과 그 부역자 응징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분노의 힘을 주권을 도둑질해 간 이들이 결코 발붙일 수 없는 토양의 새 세상을 건설하는 동력으로 삼으려는 시민의지 말이다.

그것의 증거는 집회 현장 곳곳에서 발견됐다. 일부의 과격행동 조짐에 자제를 요구하는 함성과, 경찰 차벽에 붙은 꽃그림 스티커와 시위 후 의경들의 수고를 덜어주고자 스티커를 다시 떼내는 손길들, 여기저기서 쇠파이프 대신 마이크를 들고 자신이 꿈꾸는 사회를 이야기하는 연설과 토론의 열기들이 그것이다.

세계가 놀란 것도 그 때문이다. 폭력으로 표출되는 분노는 일회성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절제되고 때론 유머로까지 승화되는 분노는 힘을 축적할 수 있는 데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향으로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기에 더욱 강력하다. 이 도도한 파도를 그저 집회나 시위로 치부하는 건 정당하지 못하다. 그것은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명예로운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대접받아야 마땅하다.

영국의 명예혁명과 미국 혁명으로 새로운 정치 체제가 만들어지고 프랑스 혁명으로 자연법과 인권이 보편적 가치로 수용됐다면, 이제 한국의 촛불혁명은 이 땅에 진정한 시민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축포라 할 만하다. 촛불혁명의 에너지는 한 민간인에 의해 공적 시스템이 망가지고 견제받지 않는 대통령 1인에 의해 국정의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고장 난 시스템을 수리하는 에너지로 전환돼야 한다. 계층·지위·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노력한 만큼 보상받고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공정 사회로 전환되기 위한 마중물로 쓰여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선진화되는 동력으로 승화될 때 촛불은 꺼지지 않고 영원히 국민들 마음속에 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최악의 대통령’은 과거가 됐고 ‘최고의 국민’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