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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질서 있는 퇴진의 길 아직 열려 있는데 ···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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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가권력을 사설(私設) 정부한테 넘겨 국정 시스템을 붕괴시킨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자격을 상실한 건 명백하다. 박 대통령이 상황을 수습하겠다면서 나라를 더 깊은 불확실성으로 몰고 가고 있다. 죄를 두 번 짓는 일이다. 그는 자기의 존재가 곧 국가라는 요상한 믿음에 갇혀 있는 듯하다. 대통령은 이쯤에서 대통령직 사퇴를 선언하는 게 본인에게도 좋고 나라를 위해 애국하는 길이다.

한국 최초의 ‘탄핵 대통령’ 되고 싶나
스스로 물러나 국가 불확실성 줄여야
일정 제시하고 사퇴 선언, 야당도 협조를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연합은 다음주 금요일인 2일, 그 다음주인 9일 중 택일해 박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키로 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의 명예 혁명을 헌법 질서 내에서 의회 시스템 안으로 흡수했다는 의미에서 올바른 선택이었다. 어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탄핵 후 로드맵’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야당의 탄핵 일정에 반대한다고 발언했다 당 소속 의원들로부터 “탄핵을 반대하는 것처럼 비춰진다”는 빗발친 비판을 받고 없던 일로 하자고 물러났다. 이는 탄핵 일정이 국민적 합의 수준으로 격상됐다는 걸 의미한다.

 국회의 탄핵안 의결은 정치적 사망선고다. 박 대통령은 2004년 국회에서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 의결이 헌법재판소에서 뒤집힌 걸 회상하며 자기도 사법적으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지율 4% 대통령의 말도 안 되는 헛된 망상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선거운동 좀 하면 안 되느냐’는 식의 선거법 위반 발언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됐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국민에게서 받은 권력을 민간인에게 양도한’ 중대한 헌법적인 문제이자 ‘대통령이 민간인을 위해 각종 이권청탁, 인사개입을 수행한’ 형법적 문제의 몸통이라는 점에서 노 전 대통령과 아예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죄질이 무겁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란 딱지가 붙기 전에 대통령직 사퇴 예고 선언을 하길 바란다. 친박이 버텨주거나, 새누리당이 갈라지거나, 야당끼리 대권 경쟁으로 빈틈이 생기리라는 상식에 반하는 요행 심리는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국민의 마음과 역사의 흐름은 이미 대세를 갈랐다. 나라의 품격을 봐서라도 대통령 거취 문제는 사법적 조치가 아니라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정치적 조치로 해소하는 게 선진적이다.

 박 대통령은 내년 2월 25일 같은 특정 일시를 하야 시점으로 국민에게 제시하기 바란다. 퇴진 유예기간에 각 정당은 조기 대선을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고 국회는 선거 관리용 총리를 합의해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있고, 남녀노소 시민들의 분노와 성토의 대상이 되는 수모의 기간도 줄일 수 있다.

 법적, 도덕적으로 자격을 상실한 박 대통령이 어떤 꼼수를 부려도 탄핵열차는 출발한다. 이 열차가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민이 강제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건 있을 수 없지만 박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박 대통령이 질서 있는 퇴진의 결단을 내리면 3야당은 여기에 협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