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누구의 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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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0년을 하나의 기점으로 형사법정의 모습은 어느 사이엔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우선 피고인들이 앉아서 재판을 받는다. 수감도 끄른다. 하고 싶은 말은 큰 제지를 당하지 않고 거의 다 개진할수 있다. 고문등 절차의 불법을 당했거나 공소 자체에 대한 이의가 있을 때는 사실심리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러한 주장과 진술부터 할수 있다. 판사들이 대하는 태도도 정중한 편이다. 절차의 면에서 「무죄추정권」이 점차 자리를 잡아나가고 었는것이다.
그러나 한편 시국관련사건의 재판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격렬한 구호나 동조의 함성, 재판 자체의 거부, 사법부에 대한 불신파 경고, 거듭되는 기피신컹을 자주 보게 된다. 문매목사·이돈명변호사가 재판을 거부하거나 항소를 포기했다. 「국대앞 사건」 「부천서 권양사건」「장기표씨 사건」 등에서 기피신청이 거듭되었다.
단적으로 사법절차는 일반적으론 상당히 발전했고, 한편 시국사건에서는 중병을 앓고 있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변호인의 입장으로서는 개탄을 넘어 처연한 심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 조차 적지 않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법관들도 곤혹과 회한의 모습을 비춘다. 결국 단순히 법관의 양심과 용기의 문제로 몰아버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어 유성환·박찬종· 조순형의원 사건등의 법정은 야당인사들로 꽉 메워진채 의정관계 활동이 때아닌 사법심사를 받고 있다. 문자그대로 「정치」 재판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분쇄하자」 「민중민주혁명을 일으키자」는 데 대한 이념 재판은 더욱 자주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정치권력의 정당성에 관한 시비도 재판의 대상이다.
노동기본권과 농민·도시빈민 문제등 사회갈등의 분출 역시 어김없이 재판을 받게된다.
이모든 사회·정치의 문제들이 사회질서와 실정법이라는 형식논리로 내세워져 법정과 감옥으로 밀어 보내지고 있으나 사법의 특성인 사건성의 카테고리로는 파악조차 어려우니 해결책은 커녕 종종 의미도 없고 억울하기만한 옥살이나 시키게 되는 것이다.
사법을 이해하는 심정에서 볼때 분명히 오늘의 법관들은 엉뚱한 남의 짐까지 떠안겨진 까닭에 공연히 그 성실성과 양심마저 비판당하는 격이 되어버렸다. 실은 정치력의 저열과 법 집행의 남용 때문일것이다.
그러나 사법권은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의 최후의 보루고 개개의 법관들은 그 수호자여야 한다.
그 보루가, 특히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에 의하여 강인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그 사회의 둑이 무너져 내려 기어이 전체주의로 돌변할 위험이 충만해진다.
사실 법관은 폭력이 아닌 최후의 사회적 권위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에게는 보통인 이상의 양심과 용기가 기대되고 상응한 존경을 받는것이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해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호석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99%의 일반사건에서 정의와 공정을 세우고 있는데 나머지 1%의 「민감한」사건에서 다소 문제가 있다해서 침소봉대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99%란 일상 사무적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문제의 본질은 바로 「1%」 에 놓여있다는 점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으로, 간혹 소신에 찬어조로 피력되는 이른바 법관의 국가관 문제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은 국가관의 강조가 예의 없이 전체주의의 경향성을 띠어왔다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국가는 공동체내의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절 역할을 할뿐 아무런 유기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혼선은 국가이익과의「조정적」 배려에서 빚어지고 있다.「말은 옳으나 더 큰 이익을 고려할 때 채택할 수 없다」 는 결론 같은 것이다. 국사범적 사건에서의 고문문제라든지, 재판결과 가 가져올 사회적 파문 또는 공권력의 권위실추 때문에 부자에게 그 불이익을 감수케 하는 경우가 그 예가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국가이익인가의 판단은 실로 자의적임을 면할수 없다. 결국 자칫 사법의 본질이 망각되며 권력의 시녀니, 정치폭력의 지배도구니 하는 격렬한 비판을 불러올 우려가 농후한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게된다.
끝으로, 권력이 사법권의 독립을 존중해주고 제도가 이를 보장해주지 않는 이상 개개 법관에게 무리한 용기와 자기 희생만을 강요할수는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반문이다. 이 반문은 사실 현실적이다. 다만 성직에 비견되는 법관의 직은 포기되는 것과 다름없다. 권력이 속없이 사법권독립을 스스로 보장해주고 나서는 예는 희귀하기 때문이다.
법은 법전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법관의 판결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는 어느 한편을 들게 된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결국 법관들이 선택하는 가치쪽의 편이 된다.
정치권력이나 힘센 자·가진 자의 편인가, 아니면 반대자·소수자·약자를 포함한 존엄한 인간 자체와 그 공동체의 편인가 하는 것이 계속 법관들에 의해 선택되고 있는 셈이다. 마치 개인적 안락과 이를 누리기 위한 「다소의」자기기만이냐, 아니면 정의와 양심,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다소의」 희생이냐의 간단없는 선택처럼.
이 선택은 물론 추상적으로는 쉬워보여도 구체적 상황에서는 절실한 상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더욱 그러한 법관의 용기를 감지케되면 사람들 역시 갈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희망에 부풀어 체제에 대한 신뢰와 아울러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반대의 경우에는 나락과도 같은 절망감은 잠시, 의로운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근래 법관의 양심과 용기를 간구하고 질타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호소가 그 도를 깊이해가고 있다. 생각있는 사람들은 합장의 자세로 주의깊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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