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와 기둥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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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나라만큼 송사 한번 하기가 힘든 나라도 드물다. 우선 소송비용이 많이 드는데다가 재판결과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기간이 걸리고 발바닥이 닳도록 법정을 들락거려야 한다.
오죽하면 송사 3년에 기둥뿌리 빠진다는 옛말까지 나오겠는가. 사회현상이 급변하고 경제가 하루가 다르게 앞서 가는데 재판을 몇년씩 질질 끌다보면 판결이 막상 나와도 사후약방문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법원은 인권과 재산을 복구해주는 국가기관인데 「복구」가 너무 늦어 빛을 못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송사기피와 권리포기 현상이 빚어지고 자질구레한 시비로 참극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늑장 재판을 하는 법관만 나무랄 수도 없다. 전국 6백여 판사가 연간 2백50여만건의 각종 소송사건을 처리하자니 재판이 순조롭게 될리가 없다.
1개 재판부가 연간 2백50∼3백 여건을, 한주일에 15∼20건의 판결문을 써야 하는 격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법원 자체조사만 봐도 민사사건 1건을 처리하는데 소요되는 기간이 7개월 9일이고 공판만도 평균 9회 이상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이 태부족한데다 공판을 열어도 소송당사자 쌍방중에 한쪽이 출두하지 않는 일도 잦아 재판 진행마저 고층이 따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재판의 생명이라 할 정확과 공정·신속한 권리복구가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사건이 자꾸만 밀리다보니 미제사건도 늘어나지만 현장검증을 아예 생략하기도 하고 심리도 충분히 않고 대강대강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오판 위험성은 항상 잠재해 있는 것이다. 소송당사자들로부터 건성재판이라는 불만이 자주 튀어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건성재판이나 오판가능성이 있는 재판은 재판불신으로만 끝나지 않고 법불신으로 까지 연결되고 사법부신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대법원이 민사조정제도를 확대 실시키로 한 것은 이같은 배경에 연유한다. 민사조정제도는 이름 그대로 소송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해관계당사자 쌍방이 만족할 수 있도록 이해를 조정해 주는 제도다.
민사조정에서 타협과 양보가 이루어져 분쟁이 조정되면 재판상의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비용도 적게들고 대개의 경우 한번 출석으로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분쟁해결이 간이한 절차로 신속하게 처리되는 잇점이 있다.
이처럼 분쟁처리 지연을 막고 비용도 적게드는 간편한 제도가 지난 62년 차지차가조정법 제정을 위시해 70년에 간이절차에 의한 민사분쟁 사건처리 특례법 제정등으로 일찌기 마련되었는데도 지금껏 활용이 안 되어온 이유를 선뜻 이해할 수 없다.
이 제도가 활성화되면 분쟁당사자는 물론이고 민사소송 건수가 크게 줄어 법관의 업무량도 경감돼 재판도 정상화할 수 있는데 이용률이 0·3%밖에 안되었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법원행정의 후진성에 기인한다.
법원은 그 속성으로 보아 지극히 보수적이며 수동적이다. 법 수호기관으로서의 법원이 보수적이라 함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에만 고수하고 권위에 집착해 안주한다면 진취적이고 적극걱인 발전의 측면은 뒤처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법원행정만은 다른 어느 정부부처나 일반기업의 행정처럼 발전과 쇄신에 민감해야 한다. 좋은 제도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덮어 두다시피한 것은 법원 행정당국자들로서는 자괴하고 자성할 일이다. 앞으로 이 제도를 널리 홍보하고 이용을 보다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행정서비스에 가일층 노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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