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과 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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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딜가나 눈에 띄는 약국이 지난 구정엔 어느 한 곳도 문을 연곳이 없어 꽤나 속상하고 답답했다. 공휴일이라 한산한 서울 잠실역 지하도를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꽈당!』소리가 나기에 무심코 돌아보았다.
한 남학생이 황급히 달려가 누군가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도 엉겁결에 뛰어 내려가 함께 부축했다.
70세도 넘어보이는 그 노인은 아마 층계를 헛디딘 모양인데 몸이 거꾸로 젖혀져 혼자 일어서질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일으키고 보니 머리 뒤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급했지만 낯선 동네였고 나도 갖고 있는 돈이 넉넉지 못해 우선 약국을 찾았다.
지하상가내 몇곳에서 약국을 발견했으나 모두 어둡게 불이 꺼져있었다. 한없이 노인을 모시고 헤맬수 없어 나는 그 남학생과 함께 안타깝게 발을 굴러야만 했다.
노인은 마침 그곳에서 버스로 십여분 걸리는 거여동의 아들네 집에 가시는 참이었단다.「요즘보기드물게(?)」착하고 친절한 그 남학생이 급한대로 댁에 모셔다 드리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다음날 출근해 생각하니 겁에 질려 피가 흐르는 상처를 휴지로 누른채 낯선 청년에게 몸을 맡기고 허둥거리시던 노인이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혹시나 해서 거여동의 어느 약국에 전화를 해보니『구정엔 모두 휴무였다』고 했다.
약국은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기관이란 사명감과 책임을 강하게 느껴야만 할것이다.
병원의 문턱이 낮아졌다지만 서민들이 더 자주 드나들게 되는 곳은 아무래도 약국이다. 그러니 약국은 공휴일에도 순번제로 쉬면서『이 부근의 ○○약국은 오늘 엽니다』라고 작은 배려를 해준다면 이웃주민들로부터 더욱 고마움과 신뢰감을 받게 되지 않을까? <서울원효로4가산호아파트f동10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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