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트북을 열며

비선 패션이 망친 창조경제

중앙일보

입력 2016.11.10 00:18

업데이트 2016.11.1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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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
박현영 라이프스타일부 차장

박현영
라이프스타일부 차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펑퍼짐한 양복이 트레이드 마크다. 한두 치수 큰 듯 헐렁한 스타일 때문에 마치 싸구려처럼 보이지만 정장 한 벌에 6000~8000달러(약 700만~900만원) 하는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 브리오니를 입는다. 워싱턴에 매장이 없는 걸 아쉬워하다가 트럼프 호텔 안에 브리오니의 첫 워싱턴 매장을 만들 정도로 아낀다.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도 브리오니 슈트를 즐겨 입는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오바마와 트럼프가 공유하는 한 가지는 브리오니 사랑”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유세 기간 미국 패션 디자이너 랄프 로렌과 니나 맥리모어의 옷을 입었다. 자칭 ‘바지 정장 광팬’답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TV토론 등 중요한 자리마다 강렬한 원색 바지 정장을 골고루 선보였다. 유럽 명품도 애용한다. 지난 4월 이탈리아 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1400만원짜리 코트를 입고 소득 불평등을 주제로 연설했다고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유권자들은 이런 소소한 정보까지 지도자를 선택하는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우리 현실과는 격차가 크다. 박근혜 대통령은 간판도, 브랜드도 없는 ‘샘플실’에서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가 만든 의상을 입고 유세하고 당선되고 국정을 돌봤다. 전직 운동선수이자 호스트바 출신이 만들었다는 가방을 들고 외교를 했다. 그마저도 사생활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비선 라인이 드러나고 나서야 비선 패션의 존재가 알려졌다.

정치인의 옷차림은 정치 행위의 일부다. 연설이나 토론 못지않게 그의 사고방식, 삶의 태도를 이해하게 해주는 소통 도구다. 또 다른 언어인 셈이다. 선진국에서 정치인의 패션이 공적 영역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직접 공개하지 않으면 언론과 전문가 집단이 밝혀낸다. 비밀 아지트에서 만든 제품이 아니라면 알려지는 건 시간 문제다.

정치인의 옷차림은 경제활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디자이너 베티나 쇤바흐의 바지 정장과 독일 컴포트 슈즈 브랜드 가버 구두를 신는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영국 디자이너 어맨다 웨이클리의 드레스와 코트, LK베네트의 호피 무늬 구두를 신고 취임했다. 자국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서다. 실제 효과도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미셸 오바마 미 대통령 부인이 패션으로 일으킨 경제 효과가 27억 달러(약 3조원)에 달한다는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공식 석상에서 입은 J크루·갭·나이키·캘빈클라인 등 29개 패션 기업의 주식가치 변화를 조사한 결과다.

지난 4년간 대통령이 국내 디자이너의 옷을 열심히 입었으면 어땠을까.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가 “옷이 시와 같다”고 칭찬한 진태옥,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는 손정완·이상봉, 파리의 문영희 디자이너에게 든든한 ‘빽’이 되지 않았을까. 르베이지와 헤지스 레이디, 타임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대통령이 생각했던 창조경제 아닐까.

박현영 라이프스타일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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