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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기 사임한 호요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지난 1941년 처음으로 등소평을 만난이후 46년간을 등과 운명을 같이해온 등의 오른팔이요 그림자였다.
그는 74년 중공과학원 부원장으로 과학계의 전문인재 양성을 위한 개혁안을 제출해 등의 정책을 옹호했는데 이것은 등에게는 세 번째, 호 자신에게는 두번째 실각의 배경이 됐던 반우경화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1m60cm의 키에 차돌같은 모습의 호는 연설을 할 때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때로는 연단을 주먹으로 내려칠 정도로 강한 제스처를 써온 정열적인 인물이었다.
1915년 모택동·유소기와 동향인 호남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중공이 길러낸 전형적인 「붉은 아이」였다.
호는 12세때인 27년9월 모택동이 일으킨 「호남추수폭동」에 총을 메고 참가한 꼬마홍군 (홍소귀)이었다.
천부적인 조직력을 가진 호는 30년 당청년연맹에 가입했고 3년뒤엔 당에 입당, 모택동의 연락병이 되기도 했다.
항일군정대에서 잠시 수학한 것이 유일한 학력인 호는 25세때 팔로군총정치부의 요직인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후 중앙군사외 총정치부 조직부장을 거쳐 56년 당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52년 공산당청년동맹(공청단)의 제1서기가 된후 문화혁명에서 숙청될때까지 공청단을 이끌어 왔는데 바로 이 공청단이 그의 지지세력 기반이 됐다.
그는 공청단 제1서기때인 58년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주장, 일찍부터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해왔다.
호는 80년 당총서기로 취임, 등-호-조자양체를 구성한후 개혁과 개방을 줄기차게 추진해왔으나 군부내 강경파를 비롯한 보수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아왔다.
그는 나이든 혁명원로들을 퇴진시키고 공청단 출신을 중심으로 한 젊고 능력있는 신진관료의 등용을 추진해왔으며 교조적인 좌파언론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서슴없이 보이는가 하면 특히 문학과 예술에서 비교적 진보적 태도를 취해왔으며 때로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나 모택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호는 스스로 『나는 쇠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뤄진 정열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80년대 초반에 중공인민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을 입은 최초의 중공지도자중의 한사람이었으며 특히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작년 서구 4개국을 순방하는등 중공지도자중에서는 해외방문 경험이 풍부하다.
호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적당한 긴장과 리듬」을 잃지 않으며 늘 낙천적으로 살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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