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한 사정 해결됐을 때 웃고, 막무가내 욕설·성희롱에 울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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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콜센터 인구아동정책팀 고보경(34) 상담원이 민원인과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임성필

상품을 구입하거나 문제가 생길 때 문의하는 곳이 콜센터다. 정보 제공, 기업 이미지 제고, 마케팅 등으로 활용된다. 기업은 고객의 요구를 파악해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익을 창출한다. 하지만 국가가 운영하는 보건복지콜센터는 다르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을 돕는 것이 목적이다. 일선에는 위기에 놓인 국민과 소통하는 전문 상담원들이 있다. 11돌을 맞은 보건복지콜센터 희망의 전화 129에는 상담원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보건복지콜센터 상담원 24시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스트레스·우울 증세 극심 민원인 감사 말에 다시 용기 내"

지난 10월 20일 오후 5시. 보건복지콜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어려운 일이 있는데 이런 곳에 전화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말끝을 흐리던 40대 여성 민원인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사연은 이렇다. 간경화를 앓고 있는 올케가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병원비를 낼 여력이 없다는 내용이다. 오빠는 건강 문제로 일하지 못해 소득이 없는 상태였다. 월세마저 수개월째 밀려 가족이 길거리로 내몰릴 위기에 놓였다. 그는 “중학생인 조카가 너무 불쌍하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현국(31) 상담원이 관할 지자체에 즉시 전화해 긴급지원비를 신청할 수 있도록 도왔다. 며칠 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의료비, 주민센터는 긴급 생계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현국 상담원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도움을 줬을 땐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든다”고 웃었다.

입버릇처럼 “고객님 감사합니다”
상담원들은 보람을 느끼는 이상으로 상처도 많이 받는다. 백승훈(29) 상담원은 얼마 전 민원인으로부터 욕설을 들었다. 민원인의 어머니가 오랜 병원 생활을 하던 중 병이 악화돼 다른 의료기관으로 옮겨야 하는데 병원을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의료기관 소개는 어렵고 대신 지역 보건소를 통해 안내받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그의 말에 민원인은 다짜고짜 욕설과 함께 “네 부모가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말하겠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뒤 민원인으로부터 사과는 받았지만 당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았다.
  여성 상담원은 성희롱을 많이 당한다. 파트장인 박혜진(32) 상담원은 최근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 50대 남성 민원인이 성적인 대화를 하는 유료전화의 요금이 많이 나왔다며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 상담원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며 막무가내로 상급자를 바꿔 달라는 요구도 상담원들의 마음을 위축시킨다. 박혜진 상담원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민원인에게 도움을 줘야 할 시간에 이런 전화를 받게 되면 기운이 빠진다”고 하소연했다.
  오랜 기간 상담하면서 생긴 습관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도 많다. 조은경(37) 상담원은 집에서 잠자던 중 전화가 오면 “실례지만 ○○○되십니까”라는 말로 가족을 황당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손지현(30) 상담원은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자신도 모르게 메모지를 꺼내 놓는 버릇이 생겼다. 상담 내용을 메모하는 습관 때문이다. 손지현 상담원은 “각종 스트레스와 억울·분노·우울·불안 증세를 호소하기도 하지만 따뜻한 말, 감사의 표현을 하는 민원인을 보면서 다시 용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개소 11주년 맞아 오늘 기념행사
정부 과천청사에 있는 보건복지콜센터는 전쟁터와 같다. 수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민원인에게 일일이 대응하는 상담원들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주부,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 자살을 고민하는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이 콜센터에 도움을 요청한다. 140여 명의 상담원은 지난 11년간 위기에 처한 국민과 소통하며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보건복지콜센터는 1일 오전 10시 정부 과천청사 교육장에서 ‘콜센터 개소 11주년 기념행사’를 한다. 콜센터의 의미를 되새기고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다. 모범 상담원, 미담 사례 우수자로 선정된 15명이 보건복지부장관상과 보건복지콜센터장상을 받는다. 박석하 보건복지콜센터장은 “희망의 전화 129는 보건복지 분야 상담이 필요한 국민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며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을 보면 129를 눌러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태우 기자 kang.tae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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