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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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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신홍 기자 중앙일보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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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홍
EYE24 차장

아수라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 혼란의 세계에 머무는 귀신들의 왕이다. 원래 고대 인도 최고의 선한 신 중 하나였지만 점차 악의 신으로 바뀌었다. 머리가 셋이고 팔이 6~8개인 아수라가 하늘과 싸워 지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전해진다. 인간이 선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해 아수라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경고도 곁들여진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는 아수라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됐다. 40~50대에겐 1970~80년대 인기 만화 ‘마징가Z’에 나왔던 아수라 백작으로 보다 친근한 단어다. 얼굴의 반은 남자고 또 다른 반은 여자인 아수라 백작은 헬 박사와 함께 지구 정복을 외치며 당시 어린이들에게 최고의 악역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불행하게도 현실의 아수라는 만화 속 백작과 달리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욕망과 이기심, 시기와 질투, 거짓과 자기 합리화, 아첨과 배신, 그리고 권력 쟁취를 위한 끝없는 모사가 한데 뒤엉켜 있는 게 우리네 일상이다. 이기는 자가 강한 자이자 정의다. 목적은 수단을 늘 정당화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힘없는 소시민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만 지를 수 있을 뿐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아수라’에 대한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영화는 관객들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아수라판의 민낯을 향해 끝까지 달리는데, 그렇잖아도 힘든 세상에 스크린에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 하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아수라판은 우리 주변에도 도처에 널려 있다. 대치동 학원가에 한번 가보라. 학생들은 저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신호는 아랑곳없이 도로를 가로지른다. 경적을 울려대도 ‘내가 왜 양보해야 하느냐’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건너다닌다. 교차로에는 아이를 내려주고 태우려는 부모들 차량이 꼬리를 물고 있다. 내 아이만 1초라도 빨리 챙기면 된다는 이기주의의 극치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신호를 지키길 바라는 것도 언감생심일 터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배움의 집합소가 혼돈의 상징이 돼버린 건 아이러니다.

하지만 어찌 이들만 탓하랴.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 정치 현실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지 않은가. 비선 실세, 권력 농단, 국기 문란에 대통령이 고개 숙여 사과까지 했지만 의혹은 양파 껍질 벗겨지듯 끊이질 않는다.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는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탄식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는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오직 선한 자들의 무관심”이라고 했다. 선한 자들이 제 역할을 해야 아수라를 넘어설 수 있다. 영화 ‘아수라’의 영어 제목은 ‘The City of Madness’. 미쳐 돌아가는 광기의 도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깨어 있는 선한 시민들의 힘이다.

박신홍 EYE24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