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252쪽, 1만2000원
“나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심과는 관계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들은 과도하지 않을 만큼 친절한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남자들은 의외로 별일 아닌 데 집착하고 그런 스스로에게 짜증과 환멸을 느끼는 순간 떠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작가 정이현(44)씨가 9년 만에 펴낸 소설집인 신간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요즘 우리 삶의 양상에 대한 어떤 진실을 전하는 느낌이다. 전체 일곱 편 중 세 편에서 뽑은 문장들이지만 한데 묶으면, 하나의 완결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이라도 그릴 것 같다. 가령 연애에 적당히 신물 난 30대 초반 여성인 ‘나’는 종종 진심이 무시되는 세상에서 친절을 가장한 채 아무런 꿈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간다. ‘작가의 말’에서 정씨가 밝힌대로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는 얘기다.
그런 진단에 동의한다면 소설집의 단편들이 실감날 것 같다. 마지막 작품 ‘안나’는 소설집 제목의 의미에 정확히 들어맞는 작품. 나머지 작품들은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정씨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 등 이전 작품들에서 평범한 표피 아래 도사린 도발적인 맨얼굴이라고 할 만한 시대 풍속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소설집의 ‘우리 안의 천사’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이다. 결혼이라는 절차 없이 함께 사는 동거 커플 남우·미지가 거액의 재산 상속을 노리고 사실상 존속 살인을 시도하는 일탈의 서사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