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경기 보러 첫 해외여행, 은퇴식 땐 박세리보다 더 눈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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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5면

박세리(왼쪽)와 스테이시 반스. 이지연 기자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12일 영종도 스카이72골프장. 이날 대회장에서는 대회를 열어준 VIP와 프로들이 함께 라운드를 하는 프로암 대회가 열렸다. 정규 대회와 달리 프로암 대회는 갤러리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골프 여왕’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 조에서 노란 머리의 외국인 갤러리가 눈에 띄었다.


미국 아칸소에 사는 스테이시 반스(44)는 박세리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자비를 들여 한국에 왔다. 아칸소에서 출발해 댈라스를 거쳐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9시간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다. 반스는 “박세리 덕분에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고, 해외여행을 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 이번이 그의 마지막 경기라는 생각이 들면서 슬퍼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이른 아침 골프장에 나와 박세리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연습장에서도, 코스에서도 박세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는 늘 반스가 있었다. 박세리의 마지막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반스는 9년 전 박세리의 팬이 됐다. 2007년 아칸소에서 열린 LPGA투어 아칸소 챔피언십 프로암에서 박세리를 처음 만난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반스는 “박세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 골프를 즐겨보지 않았다. 그러나 박세리의 스윙을 보고 한눈에 반했고 팬이 됐다. 나로 인해 주위 친구들도 박세리와 한국 선수들을 응원한다”며 웃었다.


13일 열린 1라운드는 평일인데도 박세리의 마지막 경기를 함께하려는 팬들로 북적였다. 주최 측 추산 5588명의 갤러리가 입장했다. 왼쪽 어깨 상태가 좋지 않은 박세리는 진통제를 맞고 나와 경기를 했지만 힘이 부쳤다. 젖먹던 힘까지 짜내 때린 드라이브 샷은 대부분 왼쪽으로 날아갔다. 러프와 벙커를 오가며 전반 9홀에서만 4타를 잃었다. 반스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박세리를 바라봤다. 반스는 “박세리가 마지막 팬서비스를 위해 클럽을 다시 들었지만 역시 무리인 것 같다. 어깨 부상을 입은 후 스윙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18홀이 빨리 끝나면 좋겠다”며 안타까워 했다.


박세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8오버파 80타를 적어냈다. 출전 선수 78명 중 최하위인 공동 76위. 내내 마음 졸였던 반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스는 “스코어는 중요하지 않다. 박세리가 마지막까지 큰 탈 없이 경기를 마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경기 뒤에는 동료 선수들을 비롯해 500여 명의 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세리의 은퇴식이 열렸다. 박세리는 행사 내내 눈물을 흘렸다. 반스는 박세리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 반스는 “박세리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박세리는 세계 골프 역사에 많은 업적을 남긴 대스타지만 내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나만의 골프 여왕’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골프를 하면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얻었다. 그 중에 하나가 넘치는 팬들의 사랑이다. 반스는 잊지 못할 최고의 팬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다. 반스 같은 팬들이 박세리를 추억하고 응원했기에 그의 마지막은 더 빛났다. 이날 은퇴식에 참석한 골프 후배 박지은(37)·박인비(28)도, 야구 스타 선동열(53)·박찬호(43)도 반스와 같은 마음이었다.


영종도=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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