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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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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32면

저자: 성석제 출판사: 문학동네 가격: 1만2000원

성석제(56)라는 이름 석 자에 기대하는 바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한바탕 낄낄대며 웃어보길 희망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웃음 속에 깃든 풍자 코드를 찾기 위해 입을 삐죽여 가며 책장을 넘길지도 모른다. ‘첫사랑’ 류의 노스탤지어 깃든 서정적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우리가 그의 책을 집어들 땐 무언가 설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성석제표 해학에 대한 갈증이든 못 견디게 힘든 세상살이에 대한 공감이든, 송곳 같은 그의 글이라면 빵빵하게 차오른 가슴을 조금은 뚫어주리라는 믿음이 있으니 말이다.


어느덧 등단 21년차가 된 작가가 들고 온 소설집은 이 같은 기대에 충실히 부응한다. 2013년 12월부터 올해까지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새롭게 개장한 ‘성석제 월드’에는 스스로 ‘미친’ 인간이라고 말하는 영원(‘몰두’)이 아니더라도 미친놈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누군가는 한순간에 잘나가던 어부에서 간첩으로 몰려 온갖 핍박과 고문에 미쳐가고, 돈 좀 벌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방사능을 딥따 맞고 아다마가 잘 안 돌아가’ 미치겠는 인생도 있다. 사실 미치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내 한 몸 건사하며 밥 벌어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 잠깐 한눈팔다 보면 정신줄 놓기 일쑤인 것을.


그중에서도 백미는 ‘블랙박스’다. 평소 농촌(경북 상주) 출신 특유의 부지런함을 다작의 비결로 꼽아온 작가의 분신인양 “나 역시 농부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어 자연의 시계에 때맞춰 파종하고 김매고 추수하고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원고를 마감에 딱 맞춰서 준다”는 작가 박세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마감과 고료로 움직이는 그저 그런 작가는 우연히 만난 동명이인의 블랙박스 설치 기사와 얽혀 ‘악마의 수혈’을 받는다.


소재가 고갈되다 못해 완전연소해버린 자신에게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참신하고 직설적인 감각을 지닌 또 다른 박세권의 힘을 빌어 작가 박세권의 소설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는 본격적인 대필로 이어지고 이들의 근친상간 같은 부조리한 조합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굳이 창작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봤음직한 유혹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다가도 죽음을 기록하는 매개로 사용된 블랙박스의 기묘함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든다.


그런가 하면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우노라)”에서 제목을 따온 표제작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20년 전 발표한 작가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지옥동 지옥중학교로 전학 온 꼭 계집애 같이 생긴 ‘나’와 학교 짱에게 맞아 터진 내게 손길을 건넨 산적 같던 ‘너’의 풋풋한 동성애 코드는 부잣집 도련님에서 만인의 똥개로 전락, 다시금 정상급 재불화가로 비상한 너와 불륜으로 이혼 당하고 아가씨들을 실어나르는 나라시가 된 나의 들척지근한 이별과 재회로 발전한다. 내게는 먼 나라의 일로 여겼던 이야기들이 한순간 내 삶으로 성큼 걸어들어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노태훈의 평처럼 “성석제의 소설들은 우리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라 출발했다가 그대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제법 먼 항해로 나아간 줄 알았는데 깨보면 다시 제 방 침대 안인 셈이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멋진 일이 아닐까. 더 넓어진 생각과 마음으로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문학과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한 가지에는 미치게 되어 있어. 사랑, 술, 커피, 산, 바다, 여행, 고독 어떤 것이든 간에. 뭔가에 미쳐버린 인간은 자신에게 속한 또 다른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 그런데 시나 음악, 그림처럼 고통이 수반되지 않은 쾌락이 있단 말이야. 이 현생의 우주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허락된 고급스러운 즐거움이지.”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인간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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