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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특파원이 본 워싱턴대 토론 현장] 트럼프 음담패설, 빌 클린턴 성추문…“가장 추악한 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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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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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현지시간) 열린 미국 대선 후보 2차 TV토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왼쪽)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날 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트럼프는 클린턴의 e메일 스캔들과 남편 빌 클린턴의 여성 편력을 거론하며 공세를 폈지만 클린턴은 탈세 의혹 등으로 받아쳤다. [세인트루이스 AP=뉴시스]

9일(현지시간)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에 마련된 2차 TV 토론 무대에 등장한 트럼프는 끼어들기와 막말로 끊임없이 힐러리 클린턴을 자극했다. 1차 토론에서 클린턴의 공세에 발끈해 흥분만 하다가 완패했던 경험을 거꾸로 구사하려 했다. 11년 전 음담패설 발언이 드러나며 위기에 몰렸던 트럼프가 선택한 전략이다. 이 때문에 이날 토론은 전례 없는 난타전이 됐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후보들끼리 악수조차 나누지 않은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토론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후보, 악수도 않고 난타전 벌여
트럼프 “난 말로 했지만 빌은 행동”
클린턴은 탈세 의혹 제기하며 공세

토론 시작과 함께 무대로 등장한 두 후보는 악수도 나누지 않았다. 토론 초반 트럼프는 조심스러웠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는 정중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음담패설에 해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러다 곧바로 회피 전술을 구사했다. “지금 이슬람국가(ISIS)가 참수하는 세상”이라며 “중세와 같다”며 엉뚱한 답변을 했다.

트럼프는 직후 클린턴의 e메일 스캔들이 등장하자 공격 모드로 전환했다. 그는 “클린턴은 (e메일로 주고받은) 문서에 나오는 C(기밀 표시 약자)도 모른다고 했다. 거짓말을 계속한다”고 공격했다. 클린턴이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 이야기를 꺼내자 “링컨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당신과 큰 차이”라고 또 거짓말로 연결시켰다. 트럼프는 클린턴의 경선 경쟁자였던 버니 샌더스가 클린턴 지원에 나선 것을 놓고도 “그가 악마와 서명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클린턴을 악마로 표현했다. 트럼프는 클린턴이 “엄청난 증오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도 비난했다.

클린턴은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공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중국산 철강 덤핑으로 미국 전역에서 철강 근로자들과 철강업계를 죽이고 있다”고 하자 클린턴은 “트럼프가 그걸 사서 자기 건물을 짓는 데 쓰고 있다”고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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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TV토론 후 인사 나누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트럼프 후보의 부인 멜라니아(왼쪽). [로이터=뉴스1]

이런 클린턴에게 트럼프가 준비해 온 카드는 빌 클린턴의 과거 성추문이다. 트럼프는 토론회에 앞서 빌 클린턴으로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들과 기자회견을 열더니 토론장에도 데려왔다. 트럼프는 “나는 (여성을 겨냥해) 말을 했지만 빌 클린턴은 행동을 했다”며 “빌 클린턴은 여성들을 학대했고 클린턴은 이들을 악의적으로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 역사상 빌 클린턴처럼 여성을 대한 사람이 없었다”며 “빌 클린턴은 탄핵까지 당했다”고 비난했다. 토론장 가족석엔 빌 클린턴이 앉아 있었다. 클린턴 역시 트럼프의 음담패설 발언을 거론하며 받아쳤다. “여성만이 아니라 이민자, 흑인, 히스패닉, 장애인, 전쟁포로, 무슬림까지 겨냥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과를 모르는 사람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출신이 아니라고 주장해 놓고 사과한 적이 없다”고 공세를 확대했다.

트럼프는 클린턴의 후원자들도 공세 소재로 준비했다. 그의 탈세 의혹을 놓곤 “클린턴의 친구인 워런 버핏도, 조지 소로스도 공제를 받았다”며 “(이들과 같은) 많은 이로부터 받은 돈으로 클린턴이 선거 광고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클린턴 역시 “트럼프는 참전용사를 위해서도, 군을 위해서도, 교육을 위해서도 단 한 푼도 내지 않았다”고 맞섰다.

두 후보의 공방은 증세, 건강보험 개혁, 무슬림 이민자 대책 등 전방위로 번졌다. 클린턴은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 정책)로 2000만 명이 혜택을 보고 있다”고 계승을 재확인했다. 트럼프는 “오바마케어는 재앙으로 너무 비싸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클린턴은 세금을 올리려 하지만 나는 낮추겠다”고 나서자 클린턴은 “(연 소득) 25만 달러(약 2억8000만원) 미만인 누구도 세금이 올라가지 않는다”며 부유층 증세로 반박했다.

클린턴은 시리아 해법을 놓고도 “시리아군과 러시아의 알레포 민간인 폭격에 대한 전쟁범죄 여부 조사를 계속하겠다”고 단언했다. 반면에 트럼프는 시리아를 공습할 수도 있다고 밝힌 마이크 펜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에 대해 “생각이 다르다”고 자기 색깔을 분명히 했다.

토론 막판 트럼프는 “클린턴은 포기하지 않는 파이터”라고 했고, 클린턴은 “트럼프의 자녀들은 능력이 있고 헌신적”이라고 상대를 칭찬했지만 공방 속에 묻혔다.

트럼프의 이날 전략은 결국 공세를 통한 생존이었다. 후보 교체론까지 등장하는 상황에서 반클린턴 정서로 뭉친 자신의 지지층이 원하는 클린턴 비난을 90분간 쉴 새 없이 펼쳤다. 반면에 클린턴은 트럼프에게 맞서면서도 청중을 직접 상대했다. 이날 토론은 청중의 질문에 답하는 타운홀 방식이다. 클린턴은 청중석에 앉아 있던 질문자 앞으로 다가가 눈을 맞춘 채 답변한 반면 트럼프의 시선은 TV 카메라와 클린턴을 향했다. 타운홀 방식은 또 무대에 의자가 있어 상대가 발언할 땐 의자에 앉아 경청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트럼프는 클린턴이 답변할 땐 앉아 있지 못하고 클린턴 뒤에 서 있거나 무대를 어슬렁거렸다. 마치 목표물의 약점을 노리는 맹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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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은 트럼프를 맞아 흥분하지 않으며 지지층을 안심시켰다. 트럼프 역시 음담패설 발언에 대한 클린턴의 공격에 쩔쩔매다 무너지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TV 토론 대결은 오는 19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다.

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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