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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시장 변화 놓치면 명품도 휘청…큰 기업에 넘어간 페라리 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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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불황은 산업계 지형을 바꿔놓는다. 소비자 행동 패턴이 달라지면서 기업의 흥망도 엇갈린다. 소위 명품 브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과거의 성공이 현재의 생존을 담보하지 않고 때로는 과거의 영화가 성장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요즘 많은 기업이 해봄직한 이런 고민을 이탈리아 브랜드 ‘아 테스토니’(이하 테스토니)는 몇 해 앞서 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명품 ‘아 테스토니’ CEO 판테키

테스토니는 1929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구두 장인 아메데오 테스토니가 가내수공업 형태로 창업했다. 클래식한 신사의 멋을 완성시켜 주는 최고급 남성 구두를 주력 제품으로 가방과 의류, 액세서리 등으로 확장했다. 11개국에 90개 매장을 보유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며 잘나가던 이 회사는 성장이 주춤한 상태다. 2014년과 2015년 연달아 매출액이 전년도보다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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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아 테스토니’의 브루노 판테키 CEO는 “이젠 더 이상 연령이나 소득, 직업 등의 지표로 고객 집단을 분류하기 어렵다”며 “비슷한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20대든 50대든 같은 고객군”이라고 말했다. [사진 김경록 기자]

구찌 등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후 2007년 취임한 스위스 태생의 브루노 판테키(53) 최고경영자(CEO)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 더 빨리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시장 트렌드의 변화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브랜드의 방향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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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토니는 보수적인 이미지를 벗고 스타일과 실용미를 강조하는 컨템포러리 브랜드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4~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유통업계 관계자 등을 초청해 ‘2017년 봄·여름(SS) 컬렉션 프레젠테이션’ 행사를 열었다. 악어가죽, 상어 가죽으로 만든 고가의 구두 옆에 형형색색 가죽 스니커즈와 캐주얼한 백팩이 나란히 놓였다. 행사 참석차 방한한 판테키 CEO를 지난 4일 만났다.

수제 가죽 브랜드가 굳이 패션 브랜드로 변신하려는 이유는.
“브랜드 포지션을 바꾸는 게 아니라 브랜드를 확장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동안 클래식하고 우아한 이탈리안 남성미를 보여줬다면 앞으로는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현대적 감성의 제품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3년 전만 해도 전체 매출액에서 80%를 차지하던 전통 신사화 라인을 절반 아래로 줄이고 스니커즈 등 캐주얼한 스타일과 여성 상품군을 확대한다. 퀄리티와 장인 정신, 실용성, 내구성 같은 브랜드 DNA를 다른 방식으로 상품에 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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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테스토니’의 2017년 봄·여름 컬렉션. 젊은 층의 기호를 반영해 스니커즈 비중을 늘렸고 빨강·연보라·로열 블루 등 컬러 톤을 한층 밝게 사용했다. 내년 초 여성 라인도 국내에 공식 론칭한다. [사진 아 테스토니]

왜 지금인가.
“시장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캐주얼한 스타일을 원한다. 넥타이에 슈트를 입는 클래식한 스타일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입는다. 심지어 대기업 임원도 평소에 타이를 매지 않을 정도다. 나도 맨발에 스니커즈, 컬러풀한 면바지를 입고 출근한다. 이렇게 캐주얼한 스타일을 원하면서도 퀄리티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수요가 존재한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스포츠 브랜드가 아닌 테스토니급 브랜드가 내놓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사고 싶어 하는 고객 말이다.”
이런 트렌드 변화는 이미 오래됐다. 너무 늦은 대응 아닌가.
“남성들이 슈트에 백팩을 메고 스니커즈를 신기 시작한 지는 꽤 됐지만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된 건 최근 일이다. 테스토니는 패션 트렌드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선구자 같은 브랜드는 아니다. 아주 새롭지 않더라도 테스토니만의 해석으로 내놓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미 2년 전부터 스니커즈와 백팩 등을 내놓았다. 하지만 전 세계 매장으로 고루 퍼뜨리지 못한 데다 변화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파하지도 못했다. 특히 한국 매장에는 이런 신상품이 들어오지 않아서 옛날 이미지 그대로였다. 내년 봄부터는 한국 고객도 우리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 둔화도 그 결정에 한몫했나.
“테스토니는 악어나 상어 가죽 같은 특수 가죽 제품이 강하다. 최근 유가 하락과 러시아 루블화 폭락 등으로 러시아 큰손 고객이 이탈했다. 1유로가 40루블이었다가 70~80루블까지 오르니 수요가 확 줄었다. 고객 취향도 변했다. 중국의 부정부패 척결을 비롯해 신흥국에서 지도자들의 청렴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소비가 줄었다. 눈에 띄는 상품을 피하다 보니 고가 상품 매출이 줄었고 전체 매출에 타격이 왔다.”
기존 고객은 누구고, 미래의 목표 고객은 누구인가.
“과거에는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고객 집단이 존재했다. 20세 이하, 50대 이상, 연 소득 6만 달러 이상, 1인 가구, 이런 식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고객이 유동적(fluid)인 상황이다. 때론 한 집단에 속하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한다. 서로 뒤섞인다. 이젠 이들의 사고방식이나 태도(attitude)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청바지를 입고, 정기적으로 체육관에 가고, 최신 정보를 중시하는 ‘신식’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20대이든 50대이든 같은 그룹이다. 이 그룹 또한 고정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구체적인 목표 고객은 없고 우리의 독창성과 디테일, 퀄리티를 좋아하는 누구라도 찾아오도록 만들 것이다.”
유동적이라면 붙잡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빅데이터 같은 정보가 더 많아졌는데 고객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참 묘하다. 그래서 강력한 브랜드 정체성을 갖는 게 더욱 중요하다. 고객이 파편화한 듯 보이지만 더 동질화한 측면도 있다. 해외여행이 빈번해지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접하다 보니 세계적으로 ‘패션 시차’가 사라졌다. 예전엔 한국·일본·중국·러시아 시장이 원하는 바가 다 달랐고 이탈리아와는 3~4년 정도 격차가 벌어졌다. 이탈리아에서 흰색 스니커즈가 유행할 때 한국에서는 ‘검정이나 갈색이 아니면 안 팔린다’며 거부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이젠 이탈리아에서 인기 있는 게 한국에서도 인기다.”
위기일수록 다변화보다는 핵심 경쟁력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바뀌는 시장에 응답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럭셔리 분야는 특히 그렇다. 페라리나 포르셰, 애스턴마틴 같은 럭셔리 자동차 메이커를 봐라. 한 곳도 독자적으로 생존하지 못하고 큰 기업에 인수됐다. 시장 지형이 바뀌었는데도 내 분야 점유율을 높이겠다고 소리쳐봤자 공허한 얘기다. 지금보다 10배 우수한 신사화를 만든다고 결코 시장이 회복되는 게 아니다. 시장이 왕이다. 그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기업에 조언을 한다면.
“시장의 요구에 응답하라. 핵심 DNA를 유지하면서 시장에 귀 기울여라. 시장이 요구하는 상품에 그 DNA를 심어라. 성공의 열쇠는 속도와 고객에 대한 충성이다.”

[S BOX] “롤렉스 시계, 에르메스 가방 사두면 주식보다 나아”

‘명품 불패’ 신화는 사라지는가. 장기화하는 경기 불황에 테러까지 겹치면서 유럽 럭셔리 브랜드들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최근 주춤한 성장률을 극복하기 위해 브랜드 재정비를 하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 ‘아 테스토니’의 브루노 판테키 CEO에게 명품업계의 미래를 물었다. 그는 “럭셔리 브랜드와 상품을 여러 층으로 분리해서 볼 수 있는데, 각각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명품 브랜드 CEO의 명품 구별법은 일반적인 통념과 어떻게 다를까.

“마치 금처럼 취급되는 럭셔리 브랜드가 있다. 경기가 불투명할 때 여윳돈이 있으면 부자들이 금에 투자하듯이 투자의 대상이 되는 브랜드 말이다. 예를 들어 롤렉스 시계나 에르메스 켈리백을 20개쯤 사두면 웬만한 주식에 투자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이런 극소수 브랜드는 경기 둔화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또 “콘텐트와 확실히 퀄리티가 없는 럭셔리 브랜드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요즘 비즈니스 여건이 악화하니 많은 럭셔리 업체가 마진을 챙기기 위해 상품 질을 떨어뜨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영국 같은 명품 종주국 출신의 유명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중국이나 터키, 동유럽 등 비용이 싼 나라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다. 주로 슈트에 곁들여 입는 드레스 셔츠나 티셔츠, 지갑 같은 소품 위주다.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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