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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 <36> 도나우 강 물길 따라 한 잔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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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에 나뭇잎이 툭 떨어지면, 가을이 드리운 길을 걷고 싶어진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숲길도 좋고, 궁의 뜰에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걸어도 좋다. 지난해엔 운 좋게도 낙엽이 수북이 쌓인 쇤부른 궁전(Schloss Schönbrunn), 클림트의 마지막 아틀리에(Klimt Villa), 왕궁정원(Burggarten) 등 오스트리아의 가을 길을 원 없이 걸었다. 가이드북을 만들겠다고 한 달간 머문 덕이다. 뜻밖에 마음을 끈 곳은 수도 빈(Wien)의 화려한 궁전보다 바하우(Wachau)에서 만난 가을 녘의 포도밭 길이었다. 포도가 주렁주렁 매달린 만큼 탐스러운 게 잎이 노랗게 물든 포도밭이란 걸 그때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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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우에는 도나우 강을 물길 따라 포도밭과 작은 마을이 이어진다.

도나우(Donau) 강 물길 따라 이어지는 바하우는 화이트 와인의 산지다. 특히 크렘스(Krems)부터 뒤른슈타인(Dürnstein), 스피츠(Spitz), 멜크(Melk)까지 포도밭과 작은 마을이 이어지는 약 36㎞ 구간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도 등재될 만큼 고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매년 5월마다 와인 축제도 열린다. 한마디로 강가 포도밭과 작은 마을을 거닐고,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마시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기에 바하우 만한 데가 없다. 빈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도 좋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멜크 수도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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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크에는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멜크 수도원’도 있다. 멜크 수도원은 1106년 바벤베르크 왕가가 베네딕트 수도회에 기증한 왕궁을 개축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통틀어 가장 큰 바로크식 수도원으로 꼽힌다. 그만큼 내부가 화려하다. 그 중에 백미는 9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으로 수많은 이들이 도서관을 보기 위해 이수도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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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노랗게 물든 포도밭.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이틀 전, 가을날의 여유 한 번 부려보겠다고 바하우 계곡으로 향했다. 마침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크렘스, 뒤른스타인, 스피츠에 들러 와인을 맛본 후 멜크 수도원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동선도 잡았다. 크렘스에 도착하자 강을 따라 빽빽하게 늘어선 포도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강 건너 산은 울긋불긋, 산 아래로도 언덕을 따라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 금빛 포도밭이 펼쳐졌다.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의 대표 품종 ‘그뤼너 벨트리너(Gruner Veltliner)’를 수확한 밭이 대부분이었다. 와이너리도 여러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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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스에서 맛 볼 수 있는 다양한 오스트리아 와인들.

크렘스에서도 다양한 와인을 선보인다는 ‘도매네 바하우(Domäne Wachau)’부터 가보기로 했다. 첫 시음 와인은 '고양이의 점프'라는 뜻의 캇첸스푸룽(Katzenspurung)이었다. 이름처럼 경쾌하고 산뜻한 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어서 블라우어 츠바이겔트, 피노 누아 등을 맛보는데 하나같이 부드러운 맛이 혀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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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풍경이 오롯이 남아있는 뒤른스타인의 골목길.

뒤른스타인은 크렘스 보다 더 작고 고즈넉했다. 포도밭 뒤로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고성과 중세마을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내려앉은 골목을 지나자 도나우 강과 포도밭이 시선을 끌었다. 발길을 멈추고 오롯이 가을이 내려앉은 풍경을 바라봤다. 가만히 있어도 스르르 풍경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이럼 장면이라면 하루 종일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일행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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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부르는 풍성한 점심 식사.

눈을 의심했다. 분명, 와이너리가 운영하는 소박한 식당에서 가벼운 점심이라 했는데 접시 그득 담긴 다양한 치즈와 신선한 햄은 와인 맛을 돋우기에 너무도 훌륭한 조연이었다. 주연을 맡은 와인도 하나같이 훌륭했다. 둘러앉은 사람들의 대화도 활기를 띄었다. 어느새 난 리슬링 한 잔을 비우고 다음 잔을 주문하고 있었다. 점점 일행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을 때 마다 청량한 공기를 함께 마시는 듯했다. 다만 멜크 수도원에 가기로 한 시간은 머릿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누구도 시계나 핸드폰 따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잔을 부딪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멜크 수도원에 가기로 한 시간을 미루고 스피츠에서 와인 시음을 더 할 것이냐, 와인 시음을 포기하고 멜크 수도원으로 직행 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계획보다 길어진 점심 식사 탓이었다. 일행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More Wine, More Wine"을 외쳤다. 그렇다고 멜크 수도원을 보고픈 마음이 식은 건 아니었다. 그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걷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조금만 더 늘리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스피츠의 포도밭 사이를 걷는 발걸음이 고양이의 점프처럼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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