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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조식선생 재조명작업 활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지금은 가려져 있지만 조선조 대학자었던 남명 조식선생(1501∼1572)의 면모를 새롭게 인식하려는 강렬한 의지들이 모아지고 있다.
24일 상오 저멀리 지리산이 바라다보이는 곳, 경남산청군시천면원리의 덕천서원과 이웃한 산천재에선 다수의 학자·유림들이 참석한가운데「남명학연구원」현판식이 열렸다. 덕천서원은 남명을 모신 곳이고 산천재는 그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이날 남명학연구원 이사장엔 하동근씨(전덕천서원장), 원장엔 김충렬교수(고려대)가 취임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묻혀있는 남명학의 실상을 연구를 통해 천하에 드러내는 작업을 펴기로 다짐했다.
현재 남명에 대한 연구는 전국적으로 미미한 실정이다. 오해와 소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김교수는 『남명의학문과 사상의 연구도 중요하지만 남명 문하 50가를 발굴, 정신과 지절을 중시한 이들 학파의 맥락을 파헤쳐 체계화하는 작업도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유학의 네기둥으로 퇴계(이론) 율곡(정치·교육) 다산(경세치용) 남명(정신·지절)을 꼽고 유독남기만이 묻혀있다고 지적했다.
남명은 일개 처사로 자처하며 일생을 살았다. 중종·명종·선조의 세 임금으로부터 11차례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에 오른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비는 궁안에 갇힌 과부에 지나지 못하고 임금은 어려서 제대로 정치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심은 엉망이고 나라의 기둥은 벌레가 먹어서 바람에 넘어질 것 같고 군주는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며 벼슬아치들은 주색잡기에 바쁘고 외세는 이러한 우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사약을 받을 준비를 하고 이런 직언으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왕권을 이 민족의 절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먼저 민이 있어야 국이 있고국이 있어야 군이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남명은 정권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지성인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4대사화로 퇴상할대로 퇴상한 지성계의 사기를 다시 진작시켜 관권에 맞설 수 있는 사림의 힘을 기르는데 바탕이 됐다.
결국 왕권체제에 영합, 협애한 정주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개방·원대·초월의 학문을 폈던 그는 체제가 무너지면 함께 무너지는 어용적학자들과는 달랐다.
남명은 항상 실천을 중시했다. 학문은 실천을 위한 하나의 준비요, 공구였다.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밤을 새운다든가, 늘 성성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각 시키고 검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용기 있고 강건하게 만드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실무교육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특히 임난 당시 60여명의 의병장을 배출한 사실은 주목할 대목이다.
그러나 지금 남명의 존재는 가러져 있다. 김교수는 남명이 묻혀있는 주된 이유로 당시「집권층으로부터의 미움」을 들었다. 수차례나 벼슬에 불러도 버티며 올리는 글마다 서릿발같은 비판이니 속으로 좋아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명은 일제때까지도 미움을 샀으니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의병장을 키워낸 우두머리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남명학연구가 이시대 지성계의 현실 비판력을 복원시카고 그 본연의 입장에서 분발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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