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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강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경주 용강 토용총의 주인은 누구인가.
명문지석이라도 출토한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그러나 지금 형편에서 학자들의 주장은 제 각각이다.
토통의 복식색깔이 붉은 색의 아손(아찬)이하인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공은 왕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원래「개 무덤」이란 소리를 들으며 버림받았던 무덤이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평가다.
하지만 어떤 학자는 십이지상의 출토로 봐서 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십이지상이 능 내에서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외부 봉 분을 둘러 보호하는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긴 경우는 진덕왕릉, 김유신 묘, 경덕왕릉에서 볼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43대 희강왕(836∼838년)일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희강왕릉으로 전해 오는 고분이 물론 다른 곳에 있기는 하지만 그런 가설이 흥미를 끈다.
고분의 내호석과 외호석의 이중구조가 그런 연유를 가상하게 한다는 설명이다.
내호석은 조잡하게 되어 있는데 비해 외호석은 잘 다듬어진 돌을 사용했다는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 한때 비운을 맞았다가 복권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런 가정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신라왕이 바로 희강왕이다.
42대 흥덕왕이 재위 11년에 돌아가자 종제 균정과 종질 제륭사이에는 치열한 왕위계승 쟁탈전이 벌어진다.
제륭이 바로 희강왕이다. 그는 외삼촌 김 명과 그 수하인 이홍 배훤백의 도움으로 왕권을 획득한다.
희강왕을 세문 김 명은 그와 다투던 균 정을 죽이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곤 2년 후엔 시중 이홍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국이자 왕은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소산에 묻혔고 그런 비참한 죽음이었기에 조잡한 내호석으로 밖에 치장되지 않았다.
희강왕을 죽 게하고 민충왕이 된 김 명이 온전했던 건 아니다. 그에게 패해 청해진 장보고에게 의지했던 우징은 마침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신무왕이다.
신무왕의 아들이 문성왕이고 그 다음은 헌안왕이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자 경문왕이 전왕의 사위로 즉위했다. 그러나 왕은 아직 16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실제집권자는 그의 아버지 김계명이었다. 그 김계명이 바로 희강왕의 아들이란 사실은 너무나 역설적이다.
그가 비운에 간 아버지 희강왕의 능묘를 다시 외호석으로 장식했을 것은 넉넉히 짐작이 간다.
인간사의 무상함은 거기서도 역력하다. 고분의 주인이 밝혀진다면 그런 역사의 교훈도 더 빛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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