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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수상, 바바라 맥클린턱- 백절불굴의 전사 -

중앙일보

입력

시인 김수영은 그의 명시 ‘거대한 뿌리’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을 이사벨라 비숍 여사와의 연애로 표현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바바라 맥클린턱과 연애하면서 과학에 대한 자세를 배웠다.

맥클린턱은 유전자가 정(靜)적인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로 움직일 수 있음을 발견한 업적으로 1983년 노벨상을 받았다. 생리?의학 분야에서 여성이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참고로 지난 50년 동안 생리의학 분야에서 단독 수상은 7명뿐이었다.)

맥클린턱의 인생 역정은 범상치 않다. 그는 평생을 거의 혼자 연구했으며, 발표 논문도 거의 모두 단독 저자였고, 1953년 이후에는 학술강연은 물론 학술지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NA 이중나선을 푼 제임스 왓슨은 맥클린턱을 멘델, 모르간과 함께 유전학의 3M, 우리 식으로 풀이하면 “3대 천왕”으로 불렀다. 21세기 바이오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야는 유전학이였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칭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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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클린턱은 1902년 미국 커넷티컷주의 하트포드에서 태어났다. 원래 세례명은 엘리노였으나 아이의 딱 부러진 성격에는 바바라라는 이름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 부모는 아예 법적으로 개명하였다. 실제로 맥클린턱은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즐겼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졌고, 말괄량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어머니와 맥클린턱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에 재능을 보이자 선생은 맥클린턱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여, 후에 교수가 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모친은 여자가 대학에 가면 결혼하기 어렵다며 진학을 강력히 반대했다. 의사인 아버지가 아내를 설득하여 등록일에 겨우 맞춰 뉴욕주의 코넬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코넬에서 그의 인생은 크게 바뀐다. 학부 3학년 때 그녀의 능력을 눈여겨본 유전학 교수 허치슨은 맥클린턱에게 직접 전화하여 난이도가 높은 대학원의 유전학 과목을 들으라고 권했다. 추후 맥클린턱은 “내 운명의 주사위는 이 때 던져졌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의 향방을 바꾼 전화 한 통화였다. 훌륭한 제자를 알아보고, 애써 전화해서 코치해주는 선생님, 이를 계기로 유전학사에 획을 긋는 발견을 하게 될 당년 20세의 제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에서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광경이다.

당시 유전학을 연구하는 데 쓰이던 주요 생물체는 초파리와 옥수수였는데, 코넬 농대는 옥수수 연구팀이 강했다. 맥클린턱은 박사 과정 중에 옥수수의 10개 염색체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대학원생 신분으로 이미 큰 기여를 하고, 1927년 25세의 나이로 박사를 받았다. 그 시기 코넬에는 저명한 유전학자 롤린스 에멀슨의 영향으로 조지 비들(1958년 노벨상 수상)과 (모르간 밑에서 초파리를 연구했던) 마루쿠스 로데스와 같은 걸출한 젊은이들이 대학원생으로 들어왔다. 맥클린턱은 이들과 최신 정보와 기술을 교류하며, 10여 년에 걸쳐 세포유전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염색체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실제로 관찰한 점, 특정 형질이 염색체의 어느 부위에 있느냐를 밝힌 것, 완전히 다른 유전자끼리 서로 얽혀 재조합이 일어날 때 생기는 결과, 염색체와 옥수수 알갱이 색깔의 관계, 염색체 중간과 말단 부위의 성질 등이 있다. 이는 모두 유전학 분야에서 기념비적 성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발견들이 옥수수의 세포를 염색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하며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기술과 눈썰미는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고 분석도 정밀하였기에 그녀의 명성은 자자했다. 이를 바탕으로 맥클린턱은 42세에 학술원 회원이 되고, 43세에는 미국 유전학회 회장을 역임한다. 그 후 다른 발견이 전혀 없었더라도 맥클린턱은 이미 유전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셈이다.

그런데 맥클린턱에 얽힌 전설은 그 이후의 행보 때문에 생긴다. 맥클린턱은 미주리대학에서 만족스럽지 않은 5년을 보내고, 1941년 그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될 뉴욕주의 콜드스프링하버 실험실로 자리를 옮겨 옥수수 알갱이의 색깔과 염색체의 관계를 집중 연구했다. 이 때 그녀는 옥수수 알갱이에서 누런색 바탕에 자주빛 잡색점들이 생기는 이유가, 염색체의 특정 부위가 ‘점프’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도 그녀의 현미경 관찰력이 큰 역할을 했다.

유전자는 고정된 위치에 존재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에 그녀의 주장은 ‘이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1951년 콜드스프링하버 심포지엄에서 결과를 발표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데이터를 믿지 않았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가장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이 “그녀가 얘기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맥클린턱이 그리 얘기한다면 맞는 말이겠지”라는 거장 알프레드 스툴트반트의 코멘트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복사기나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발표 논문의 재본(reprint)을 달라는 요청을 받느냐가 학계의 관심도를 가늠하는 지표였다. 그런데 그녀의 발표에 대해 재본 신청 요구가 거의 없자, 맥클린턱은 1953년부터 논문 발표를 중단하고 모든 결과를 그녀가 소속된 연구소의 연보(年譜)에만 실었다. 그녀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져갔지만, 그는 여전히 1주일에 6일,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옥수수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든 실험과정과 결과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20여년이 지나 마침내 박테리아, 초파리, 효모 등에서도 유전자가 이동하는 것이 관찰되자 학계는 그녀의 주장을 믿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에 수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이동 유전자를 연구하며 명성을 쌓고 대가가 되었기 때문에 이 분야 자체가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되었다. 맥클린턱이 마침내 1983년에 81세의 나이로 노벨상을 받으니 첫 공식 발표 후 30년이 지난 후였다.

대학원생 시절에 맥클린턱의 전기를 읽고, 그녀의 과학에 대한 집념, 신기에 가까운 실험기술, 정밀 분석을 통한 명확한 결론 제시, 주변의 비아냥에도 꺽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 등 과학자가 가져야할 많은 태도를 배웠다. 김수영에게 이사벨라가 있었다면, 나에게는 바바라가 연인이 되어 북극성처럼 나의 젊은 시절을 이끌어 주었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