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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것 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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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인가, 가족들이랑 다같이 노래방에 갔는데 치범이가 '아버지한테 바치는 노래'라며 싸이의 '아버지'를 제게 불러줬어요. 왜 오늘 유독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 고(故) 안치범(28)씨의 빈소에서 아버지 안광명(52)씨가 말했다. 지난 9일 화마(火魔) 속에서 초인종을 눌러 이웃들을 구하고 세상을 떠난 아들 치범씨를 아버지 안씨는 그렇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9일 오전 4시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 5층짜리 원룸 건물에서 불이 났다. 방화였다. 동거녀의 이별 통보에 격분한 한 20대 남성의 짓이었다. 안씨는 불이 난 직후 빠르게 탈출했다. 하지만 119에 신고를 한 뒤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새벽 시간에 자고 있을 이웃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였다. 안씨의 초인종 소리를 들은 1~3층 사람들은 서둘러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4~5층 사람들은 베란다로 나가 구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이웃들을 대피시킨 안씨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는 5층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유독가스에 질식해 쓰러진 채 발견됐다. 뇌사 상태로 열흘간 사경을 헤매던 안씨는 결국 20일 오전 2시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안씨는 "치범이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게 8일 오후 11시쯤이었다. 우리 부부가 추석을 맞아 딸이 있는 중국 상해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는데 치범이가 공항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며 전화를 끊었었다"고 회상했다. 눈가는 이미 촉촉히 젖어 있었다. 안씨는 누나 둘이 결혼을 해 모두 해외에 나가게 되면서 부모님을 더 살뜰히 챙겼었다고 한다. 활달한 성격이라 주변에 친구도 많았다.

안씨는 목소리가 좋아 성우학원에 다니며 성우를 꿈꾸고 있었다. 성우 준비를 하며 틈틈히 봉사활동도 다녔다. 한 번은 장애 아동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여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빈소에 치범이 친구들이 참 많이 찾아오더군요. 짧은 생이었지만 내 아들 참 잘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안씨의 발인은 22일 오전 6시30분이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유족들은 안씨의 의사자 신청을 할 예정이다. 의사자 신청 절차는 유족들이 신청서를 제출하면 구청이 공적조서와 사실조사확인서를 추가로 작성해 서울시로 보내고, 서울시는 이를 검토 후 보건복지부에 전달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면 복지부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의사상자 심의위원회에서 신청자들의 의사자 선정 여부를 결정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경찰의 수사기록 일지다. 서울 마포경찰서가 확보한 CCTV 화면에는 안씨가 건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장면만 담겨 있다. "초인종 소리와 목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 이웃들은 있었지만 안씨의 모습을 확실히 본 사람은 없다. 경찰 관계자는 "건물 내부에 CCTV가 없다보니 경찰에서도 증거를 최대한 확보해 유족들을 돕고 싶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 안씨는 "우리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이 것(의사자 신청)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포구청 관계자는 "구청 복지행정과 직원들이 20일 안씨의 빈소로 찾아가 유족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 안씨가 의사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구청에서도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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