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스페셜 칼럼D

자동차 탄생에 버금가는 자율주행 혁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888년 8월 5일 아침, 독일 만하임에서 삼륜 가솔린차 한 대가 시동을 건다. 세계 최초로 상업용 자동차 특허(1886년)를 딴 칼 벤츠의 파텐트 모토바겐(Patent Motorwagen)을 그의 아내 베르타(Bertha)가 남편 모르게 끌고 나와 시험운전에 나선 것이다. 목적지는 어머니가 사는 포르츠하임. 시속 16킬로미터에 106킬로미터 여정을 기름도 넣고 잔 고장을 손보느라 12시간 걸려 한밤중에 도착한다. 칼은 전보로 그 소식을 듣는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 장거리 주행이었다. 당시엔 말이 끌지 않는 객차란 상상도 못할 개념이었다. 보수적인 교회에다가 황제가 말을 좋아했다고 한다. 말이 빠진 자동기계를 남자의 도움 없이 여자가 장거리 운행을 했으니 전국적 뉴스가 되고도 남았다. 특허를 얻기까지 투자를 한데다가 시험운전의 리스크를 정면 돌파한 베르타의 담대함은 ‘벤츠 차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라이브 마케팅의 효과를 거두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베르타는 남편에게 개량의 아이디어를 준다. 기어가 없어 언덕을 오르려면 밀어야 했던 것을 기어를 넣도록 했고, 브레이크, 핸들, 파워도 보완한다. 브레이크 라이닝은 나무 대신 가죽으로 바꿔 패드를 개량한다. 자동차 특허에 앞서 벤츠는 1876년 내연기관 특허를 내고, 3년 뒤 세계 최초로 가솔린 엔진을 개발했다. 곧이어 벤츠사(1883년)를 세워 6년 뒤엔 572대를 생산해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가 된다.

독일은 베르타의 모험적인 기업가 정신을 기려 2008년 ‘베르타 벤츠 기념 루트’를 ‘인류의 산업적 유산의 길’로 공식 지정하고 격년으로 골동품 차 랠리를 개최한다. 이 모델은 7년간 총 25대가 생산됐는데 베르타가 몬 것은 세 번째 제작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10대 중 하나가 서울에 있다. 2014년 한독 수교 130주년을 기해 메르세데스 벤츠사가 서울시에 기증, 동대문 DDP에 상설 전시됐다.

벤츠와는 별도로 다임러(1834-1900)는 마이바하와 함께 1876년 내연기관을 개발한다. 10년 뒤엔 고압 점화식 가솔린 엔진을 얹은 오토바이를 시험 주행한다. 1887년엔 이 엔진을 달아 마차를 개조해 네 바퀴 차(시속 11.8km)를 제작하고,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한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별개로 가솔린 내연기관과 자동차 기술의 특허와 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시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었을까. 장소는 독일의 만하임과 슈투트가르트였다.

이 두 선구자 사이에는 가솔린 내연기관 개발을 놓고 잠시 우선권 논쟁도 있었다. 1890년 무렵 벤츠사(Benz & Cie.)는 다임러사(Daimler-Motoren-Gesellschaft, DMG)와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경제위기 탓에 두 회사의 생산대수는 벤츠가 앞서긴 했으나 1천여 대에 머물었고 급격한 인플레로 생산단가가 높아진다.

두 회사는 결국 1926년 다임러-벤츠사로의 합병을 선언한다. 브랜드는 메르세데스 벤츠. DMG 차의 대표 모델이 선택된 건에, 그 스펙을 만든 옐리넥(Emil Jellinek)의 열 살짜리 딸 메르세데스의 이름이 들어간다. 합병 때 새로 정한 로고가 오늘날도 품질의 상징처럼 된 ‘세 개의 점을 향한 별’이다. 의미는 다임러의 모토였던 ‘육상-상공-해상에서의 엔진’이다. 합병 이듬해인 27년 생산대수는 세배(7,918대)로 뛴다. 23년에는 트럭 생산의 디젤 라인이 추가돼 세계 최초의 디젤 트럭을 선보인다. 36년엔 최고 시속 95킬로미터의 디젤 승용차가 나온다.

디젤(Rudolf Diesel, 1858-1913)도 독일 출신이다. 디젤 엔진은 가솔린 차의 공기-연료 혼합물의 스파크 점화 방식이 아니라 점화장치 없이 기체가 압축될 때 고온에 의해 연소실에서 압축 점화가 일어나도록 설계된다. 1892년 독일 등 여러 나라 특허를 얻은 디젤 엔진은 증기기관(10%)에 비해 열효율이 훨씬 높은 것이 강점이다(75%). 주인을 갑부로 만들어준 디젤 엔진은 1910년대 이래 잠수함, 선박, 트럭, 중장비, 발전설비, 광산에 도입된다. 70년대 이후엔 미국 자동차에 장착되는데, EU 자동차 판매의 50%, 프랑스 70%, 영국 38%를 차지하는 등 유럽에서 선호도가 높다.

현재 자동차 세계 시장 규모는 연간 2조 달러다. 우리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2900만대(2014년)로 3명당 한 대 꼴이다. 미국은 1.2인당 한 대 꼴. 그러나 백 년 전까지는 자동차는 큰 부자들의 고급 장난감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수많은 스케치 가운데 자동차나 비행기의 원형이 들어있는 걸 보면 기계문명에 대한 인류의 꿈은 오래된 것 같다. 독일, 프랑스에 이어 미국은 1893년에 가솔린차를 개발하지만 자동차 대중화 시대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건 헨리 포드였다.

포드사는 1896년엔 자전거 바퀴 네 개를 달고 에탄올을 연료로 달리는 첫 모델(Quadricycle)을 내놓는다. 이것이 4륜 자동차의 원형이자 ‘헨리 포드 Co.’를 탄생시킨 모체다. 1903년에는 실용적인 모델 A(850 달러)를 생산하고 ‘포드 모터 Co.’로 개명한다. 그러나 당시의 자동차는 계속 손질을 해야 해서 기사가 필요한 복잡한 기계였다. 포드는 단순하고 고장 없는 차를 만들리라 작정한다. 포드 근로자들이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값싼 차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 실현을 향한 혁신 아이디어는 시카고 도살장에서 나온다. 시카고 정육공장 도살장 시설의 컨베이어 벨트 해체 라인을 본 엔지니어 클랜(William C. Klann)은 자동조립 라인을 설치할 것을 보고한다. 포드는 그 아이디어를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차를 조립하러 사람이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 조립라인에 서 있으면 차가 오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재도 바꾼다. 포드사는 철강도 생산했는데, 모델 T엔 처음으로 바나듐 강철을 써서 강도가 세배면서 다루기 쉽고 가벼운 차체로 개량된다.

4년여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08년 모델 T가 825 달러로 모습을 드러낸다. 조립에 걸리는 시간은 12시간 반에서 6시간 이하로 줄어든다. 색상은 초기엔 여럿이었으나 1913-25년에는 검정만 생산한다. 4기통 20마력에 최고속도 시속 65-70킬로미터. 모델 T는 첫해 만대 이상 팔렸고, 4년 뒤 575 달러로 값이 떨어진다. 25년에는 300 달러가 된다.

1914년 포드는 세상을 놀라게 한다. 수천 명 근로자의 임금을 일괄적으로 하루 9시간 2.38 달러에서 하루 8시간 5 달러로 대폭 올린 것이다. 1918년 공장(River Rouge) 신설 뒤에는 하루 6달러로 올린다. 산업계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포드의 임금 인상에 산업계는 당황했고, 사람들은 ‘크레이지 헨리’라 수근거렸다. 당시 미국은 노동운동의 과격화로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의 국제 네트워크가 조직적으로 저항을 벌이던 때였다.

포드는 약속대로 근로자들이 차를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임금 인상 효과는 포드의 자동차 시장 장악의 결실을 낳았다. 14년 시장 점유율 48%가 되고, 모델 T 증산으로 4천명이 더 고용된다. 17년에는 조립시간이 93분으로 단축된다. 모델 T는 1927년까지 18년 동안 1천5백만 대가 팔렸고, 훗날 20세기를 대표하는 차로 뽑힌다. 후속 모델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다시 모델 A로 명명된다.

포드의 자동차산업 혁신은 대량생산이라는 현대산업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낳았다. 포드주의는 20세기 이즘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세상을 바꿨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대량폐기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사회적 인프라도 바뀌었다. 25년 도로 공법에서는 클로버 잎새형의 고속도로 교차 방식이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대중화로 자동차가 일상생활 속에 들어온 것은 1960년대였다. 이 무렵 자동차 산업은 미국의 산업구조 자체를 바꾸면서, 일자리의 1/6 이상이 자동차 관련이었다. 기술도 핸들, 유압 브레이크 등 비약적인 발전을 보인다. 가장 중요한 연관산업은 정유산업이었다. 19세기까지는 램프용의 등유를 얻는 게 중요했고, 휘발유는 거의 산업 폐기물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 자동차가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자 정유공정에서 휘발유를 많이 싸게 빼내는 게 절실해진다.

1911년 스탠더드 오일사의 정유공정 책임자 버튼(W. Burton)은 크래킹 방식을 고안한다. 가열 가압 증류 과정에서 섭씨 400도로 가열하니 말간 기름이 두 배 수율로 얻어진 것이다. 21년에 버튼은 그 공로로 퍼킨 메달을 받는다. 그때 그는 탱크 폭발 가능성이 큰 위험한 방법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이후 공정 개선으로 연속 크래킹법이 보급된다. 자동차 대량생산 체제와 맞물려 정유산업은 10년 내에 최고 산업으로 부상한다.

베르타가 남편이 개발한 차를 시험주행 한 바로 그 해 1888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는 외과의사 던롭(John B. Dunlop)이 타이어 개량으로 자동차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슨 조화였을까. 던롭은 어린 아들 조니에게 세 발 자전거 타이어를 고쳐 생일선물로 준다. 울퉁불퉁한 길에서 뒤뚱거리며 타는 걸 보고 딱딱한 고무 타이어를 공기 큐션의 타이어로 바꿔준 것이다. 아버지는 수술대에 까는 고무 시트로 자전거 바퀴를 싸서 외과의사의 노련한 솜씨로 바느질한 뒤 접착제를 발라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하고 축구공 펌프로 공기를 불어넣었다. 표면을 탄력 있게 만든 이것이 세계 최초 공기 타이어다.

그는 이어 경기에 출전하는 무명 선수의 자전거 바퀴에 공기 타이어를 달아줘 경기마다 우승하게 만든다. 던롭의 유산은 모터 스포츠의 발전이다. 이후 자동차와 타이어 회사들은 자동차 경주대회를 치루며 고성능 엔진과 타이어 품질을 개량하고 시트로엥, 부가티, 드라즈, 알파 로메오 등 세계적 명차를 탄생시킨다.

던롭은 즉시 특허를 얻고 1890년 더블린에 던롭사(Dunlop Pneumatic Tyre Co. Ltd.)를 세운다. 3년 뒤에는 독일, 1895년엔 프랑스, 캐나다, 호주, 미국 등지에 회사를 세운다. 1910년엔 말라야(Malaya)에 5만 에이커의 고무농장을 매입하고, 13년에는 일본 고베로 진출한다. 던롭의 특허 이후 20년 만에 딱딱한 타이어는 멸종된다. 던롭은 최초의 글로벌 다국적 기업을 설립한다. 훗날 1984년 던롭의 유럽, 미국, 일본 비즈니스는 수미토모 그룹으로 개편된다. 1999년 다시 수미모토와 굿이어의 글로벌 얼라이언스로 세계 최고의 타이어 제조회사로 재편된다. 현재 연간 생산량은 10억 개다.

영국에서 던롭이 타이어 회사를 차린 지 8년 뒤, 미국에서 굿이어(Goodyear)사가 설립된다(1898년). 그동안 자전거 타이어, 말굽 패드를 만들다가 자동차 타이어도 만들게 된 것이다.
굿이어는 포드에게 경주용 타이어를 공급하고, 1903년 최초의 튜브리스 자동차 타이어 특허를 낸다. 처음부터 모델 T에 장착되고, 1909년 최초로 공기식 비행기 타이어를 생산한다. 1차 대전 때는 소형 비행선과 벌룬 제작에 주력한 뒤, 26년에는 세계 최대 고무회사가 된다. 24년에는 독일 제펄린과 조인트 벤처를 했다가 2차 대전으로 결별하고 2011년에 다시 파트너사가 된다.

이들 유서 깊은 타이어 기업을 앞질러 현재 타이어 업계 1위에 오른 것은 브릿지스톤 그룹이다. 2014년 기준 24개국에서 141개 생산시설(2005년)을 거느리고 있다. 미쉐린이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브릿지스톤사는 1931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쇼지로 이시바시(石橋正二?)가 설립했다. 회사명 자체가 설립자 이름(石橋)의 앞뒤를 바꾼(stone bridge) 것이다. 

기사 이미지

[일러스트=박용석]

후발주자인 브릿지스톤은 당초 일본 기술에만 의존한다는 원칙을 고수했고, 경영난이 심했다. 더욱이 2차 대전으로 군수용 생산의 제약을 받았고, 폭격으로 인한 국내 시설 파괴에 해외 자산도 소실된다. 종전 후 일부 지역 시설을 기반으로 품질과 공정 개선을 통해 모터사이클을 생산한다. 그것도 접고 다른 경쟁업체들에게 오토바이 타이어를 공급하는 것을 토대로 일어선다.

51년 일본 최초의 레이온 코드 타이어를 내놓고 설비 현대화에 나서면서 2년 만에 국내 최대 타이어 업체로 떠오른다. 59년에는 나일론 타이어를 시판하고 도쿄에 시설을 신축한다. 61년 증권거래 시장에 상장하고 총 품질관리 체제로의 개편으로 경영 쇄신에 나선다. 67년에는 회사 최초의 래디얼 타이어 RD10을 판매한다.

70년대 오일쇼크 때는 래디얼 타이어 기술 혁신에 집중, 78년에 수퍼 래디얼(Super Filler Radial)을 선보이고, 이듬해 고성능 포텐자(POTENZA) 래디얼 타이어를 출시한다. 해외 확장도 계속하면서 84년 회사명에서 타이어를 빼고 브릿지스톤(Bridgestone Co.)으로 바꾼다. 88년에는 미국 오하이오 주의 파이어스톤(Firestone Tire and Rubber Company)을 사들인다. 2014년 브릿지스톤은 미 법무부로부터 자동차 부품산업에서의 낙찰과 가격 담합 관련 벌금형(4억2천5백만 달러)을 받고 부당 행위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브릿지스톤, 굿이어와 함께 세계 3대 타이어 회사에 드는 회사가 미쉐린(Michelin)이다. 1889년 프랑스에서 고무 공장을 하던 두 형제가 설립자다. 공기식 자전거 타이어를 수리하다가 접착하는 대신 뺐다 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특허를 낸다. 1891년 세계 최초 장거리 사이클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의 자전거에 장착해 유명해진다. 20년대 이후에는 베트남에서 대규모 고무산업을 추진한다. 30년대 파산상태가 된 시트로엥을 인수한다.

미쉐린의 몇 가지 신기술 가운데 46년 래디얼 타이어가 히트작이다. 핸들링과 연비가 우수한 래디얼 타이어는 유럽과 아시아로 퍼지고, 60년대 후반 미국서도 호평을 받아 시장을 완전 점유한다. 88년에는 굿리치(American B.F. Goodrich Co. 1870년 설립) 타이어와 고무 생산부서, 미국, 호주 등의 기업 인수, 다국적 기업의 사세를 확장한다. 2008년에는 다시 세계 최대 타이어 제조원이 되는 등 브릿지스톤과 1, 2위를 겨루고 있다.

제2차 대전 중 자동차 공장은 군수용 조달 중심으로 바뀐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들이 생산한 군수물자는 달러 가치로 미국의 총 군수 생산품의 1/5을 차지했다. GM은 40년대 자동차 대신 폭격기 생산으로 전환해 B-24, B-17 등의 생산기지가 된다. 포드는 42년 2월부터 민수용 생산을 중단하고, B-24, 지프, 탱크 엔진 등을 제작한다. 포드 공장은 유럽 도처에 있었고, 영국 정부에게 비행기 엔진을 공급한다. 신설된 공장(Willow Run)에는 B-24 폭격기 생산라인이 깔려 42년부터 한 달에 수백 대씩 꼬리를 물고 나온다. 폭격기는 시간당 한 대씩 생산돼 전쟁 중 포드의 생산 물량(비행기 86,865대, 엔진 57,851개)은 엄청났다.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서 일본의 위상은 탄탄하다. 도요타는 2015년 1천만대 이상의 판매로 세계 1위다. 독일 폴크스바겐을 따돌리고 4년 연속 글로벌 판매 1위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에는 “일본이 일체의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것이 명기된다. 이후 전자, 가전, 자동차 등의 민수용 산업에서 투자와 기술 혁신을 이룬 결과 이미 50년대 세계 자동차 산업의 핵심 축으로 부상한다. 70년대 에너지 쇼크에서도 에너지 효율화의 기술혁신에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된다.

역사상 자동차 기술의 원조는 증기차였다. 최초의 자동차는 1769년 프랑스 장교 니콜라 퀴노가 나무로 만든 세 바퀴 트랙터다. 앞쪽에 무거운 증기엔진이 달린 이 자동기계의 최고시속은 3킬로미터 남짓이었다. 걸음마 수준이다. 핸들이 뻑뻑하고 브레이크가 없어 시험주행에서 커브를 돌다 담벼락에 부딪쳐 쓰러진다. 증기기관의 승용차 개발은 1801년 영국의 광산 기술자 리처드 트레비딕이 만든 마차 모양의 9인승이다. 그는 주행시험에서 친구 8명을 태우고 시냇물을 건너다 그만 빠져 버린다. 인근 선술집에서 술로 몸을 녹인 뒤 다시 주행한다. 그런데 다리에 빠져 두 명의 부상자를 낸다. 이걸 최초의 음주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

자동차 역사에서 20세기 초까지 대접을 받은 건 전기자동차였다. 최초의 전기차는 1830년대 전기마차 형태였다. 1865년 프랑스에서 축전지를 쓰는 형태로 바뀐다. 대중의 관심을 끈 건 1881년 파리 국제전기박람회에 선보인 구스타프 트루베의 삼륜 전기차다. 기어를 바꿀 필요도 없고 소음이 적어 인기였다. 그 뒤 1884년 영국 토마스 파커(Thomas Parker)가 개발한 모델은 1900년 초반 양산됐고, 마차 모양이었다. 전기차는 속도가 느려선지, 여성용으로 인식돼 ‘마담 차’로 불렸다. 1912년은 전기차의 절정이었고, 모델 T에 밀려 퇴장한다. 차 가격이 비싼데다 20년대 텍사스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는 등 가솔린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밧테리 무게, 충전시간, 저속 등 기술력 열세도 원인이었다.

1900년 뉴욕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모터쇼에는 세 가지 모델이 출품된다. 가솔린 차, 증기 차, 그리고 배터리 전기차. 구경 온 사람들은 운전까지 해볼 수 있었다는데, 가솔린차는 잘 달리면서 매연과 기름 냄새를 풍겼고, 증기 자동차는 폭폭 수증기를 뿜는 데다 시끄러웠고, 배터리 차는 조용히 달렸으나 배터리가 닳았다. 당시는 가솔린차로 인한 환경오염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지 않던 시절이다.

자동차는 사회문화적으로 기계장치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특히 서구에서는 사람과 기술과의 ‘러브 어페어’라 표현할 정도다. 질주본능과도 연관되는 건가. 최근 전기차는 1회 충전의 주행 가능 거리 제한을 극복해 가솔린차와 똑같은 속도감을 실현했음에도 주행거리 불안증은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자동차 기술 보급에는 로직 이상의 무엇이 작용한다는 의미일까.

작년 폭스바겐의 디젤차 배기가스 측정 조작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2008년 포르쉐를 합병한 후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을 노리는 폭스바겐의 주요 병기는 디젤엔진이었다. 온실가스 배출이 적고 연비는 좋은데 질소산화물과 미세먼지 배출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약점이 걸림돌이었다. 그 해결을 위해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고급 기술 조작 사기를 벌인 것이다.

환경당국이 인증검사를 할 때 실험실에서만 검사한다는 점을 악용, 실험실 검사에서만 오염물질이 적게 나오는 임의 설정의 소프트웨어를 개발 장착한 것이다. 그간 판매된 12만 5천522대에는 리콜 명령을 내렸고, 최초로 정부가 환경분야에서 외국기업을 고발하는 사례가 됐다. 조작 스캔들은 미국에서 먼저 적발됐고, 이 사태로 EU는 자동차 검사 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대응과도 맞물려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 기준은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자동차 산업은 차체를 ‘가볍게 더 가볍게’ 만들어야만 하는 처지다. 가벼울수록 연비(燃比)가 좋아져 배기가스가 줄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알루미늄·마그네슘·티타늄이 각광을 받고, 친환경 신소재, 천연 복합 소재 연구가 활발하다.

1880년대부터의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서 현재와 같은 지각변동은 없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로 세상을 바꿨다고 하지만 오늘날의 융합 혁신은 질적으로 다르다. 가위 자동차 산업혁명이다. 기계산업과 IT 간의 전폭적인 융합을 놓고 업종 간 합종연횡과 경쟁-협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자율주행차 시대와 전기차 시대가 맞물려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진화에서 증기, 전기, 가솔린의 세 가지 동력원 사이의 경쟁에서 전기가 20세기 초반에 패하고 가솔린에게 완전히 자리를 내주었다가 이제 자율주행차 개발 경쟁으로 다시 빠르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2030년경에 자율주행차 상용화 시대가 열릴 것이라 한다. 또한 2030년경 전기차가 시장의 30%가 되리라 한다(IEA). 자율주행차 개발은 전기차로의 변신과 맞물려 전개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율주행 기술의 장착은 이미 진행형으로 지능형운전보조시스템(ADAS)은 보편화됐다. 미국 테슬라는 2015년 전기차 모델 S에 소프트웨어의 업데이트만으로 자동주행을 추가했다.

전기차의 앞날은 중국을 바라봐야 할 상황이다. 중국의 2015년 전기차 판매량(14만대)은 전년 대비 87% 늘었다. 일본의 100만대, 미국의 50만대 수준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지만, 2020년까지 연평균 57%의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 한다. 중국 정부는 전기차 비중을 2025년까지 20% 이상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심각한 대기오염 해결을 위한 정부 지원 정책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베이징시는 전기차를 차량 5부제 운행 제한에서 제외시켰다.

2016년 세계최대가전전시회(CES)에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가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네 바퀴 달린 디지털 기기’니 ‘타고 다니는 컴퓨터’니 하는 말이 실감나게 자동차가 가전 쇼의 주연이 된 것이다. 자동차의 변신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은 이미 막을 올렸다. 자율주행차와 전기차 개발에서 구글, 애플, 우버, 바이두 등은 IT쪽에서 진입한 기업이다. 테슬라, 도요타, 제너럴 모터스, BMW, 볼보, 현대차 등 자동차업계는 다수가 2020년 제품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닛산은 전기차의 선두주자로 단일 차종으로는 리프(Leaf)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았다.

자동차가 전장(電裝)화되고 동시에 전기차로 전환되면서 한편에선 센서와 카메라, 디스플레이, 각종 주문형 반도체와 이를 운영하는 알고리즘 등이 핵심으로 부상했다. 결국엔 자동차도 스마트폰처럼 가장 효과적인 운영체제(OS) 개발에서 성패가 갈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와 모터 등이 핵심 장치가 되고 있다. 여기에 기존 기계장치가 합쳐져서 자동차는 주요 첨단기술이 집약된 결정체가 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자율주행차 사업을 적극 지원한다고 밝혔다. 수년 내로 시험주행·시범운행단지·실험도시 구축 등 인프라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재계 순위 1, 2, 4위의 삼성, 현대차, LG는 앞다투어 신성장동력으로 자율주행차를 내세웠고,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과의 파트너십 구축이 활발하다. 글로벌 자동차산업혁명에서 유례없는 경쟁을 벌이게 된 셈이다. 특히 전장(電裝)화 사업은 B2B(기업간 거래)라서 네트워크 구축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미 글로벌 파트너십은 대세를 이루었다. 구글은 아우디와 손잡고 자율주행차 개발에서 자동차 업체보다 기술력이 높다고 한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자율주행차 F015를 선보였다. 애플은 프로젝트 타이탄으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을 진행하면서 벤츠·BMW와 손잡고 있다. LG는 구글의 자율주행차 프로젝트 협력사로 선정됐고, GM의 차세대 전기차 전략적 파트너가 돼 구동모터, 인버터, 차내 충전기, 전동 컴프레서, 배터리 백 등 11종의 핵심부품을 공급한다. 메르세데스 벤츠와도 스테레오 카메라 시스템 공동개발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자율주행차 운행의 시범도시도 눈길을 끈다. UAE의 마스다르 시티는 일반 자동차의 진입을 금지해, 도시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자율주행 궤도차량으로 이동하게 하는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 5년간 2백만 명이 이용했고 사고는 없었다고 한다. 도로의 2m 간격의 자석으로 운행되며 자율주행차의 데이터베이스를 중앙관제센터에서 받아 위치와 속도 등을 파악한다.

우리 지방정부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경기도는 판교에 세계 첫 자율주행차 주행 도로를 만들어, 제2 판교 테크노밸리를 자율주행차 실증지구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금년 3월 제주도에서는 ‘제3회 국제전기차엑스포’가 열린다. 전기차 관련 국제표준 논의도 진행될 것이라 한다. 참가 회사는 120여 개 사로 3D 프린터로 전기차를 만드는 로컬모터스 등 신생업체도 들어있다.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 전기차를 최초로 공개한다. 중국의 전기차 회사 BYD는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를 300㎞에서 400㎞로 늘린 신형 E6를 공개한다.

엄청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자율주행차·전기차 시장은 불확실성이 적지 않다. IT와 기계산업의 융합에서 기존의 관성 때문에 IT 업계가 진입하기엔 자동차 산업계의 벽이 높고, 완성차 업계가 변신하기엔 전장(電裝)사업화의 소프트웨어 기술 경쟁력 확보가 관건이다. 일례로 테슬라는 첫 작품인 로드스터 개발에서 스포츠카업체의 가솔린차를 기반으로 제작하면서 구조 차이로 애를 먹었고 불리했다고 털어놨다. 전기차는 바퀴와 문이 달렸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가솔린차와는 다르기 때문에 내연기관 중심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에서 진입하더라도 두 산업이 융합되려면 경쟁-협력에 의해 불확실성과 돌발적 변수를 극복해야 한다. 시장 예측에서도 2030년 120조-400조원이라니 상당히 차이가 난다. 비교한다면 2015년 스마트폰 시장은 320조 원 규모였다.

사설택시 앱으로 알려진 우버는 수송 혁신 체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우버는 택시기사를 자율주행차로 대체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차를 산다는 개념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이 결합하고 동시에 교통 수요공급 관리의 혁신 기술과 결합한다면 누구나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장시간 주차 상태로 놔두는 차를 굳이 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시나리오 탓일까, 미국은 현 자동차 대수 2억4,500만 대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 예측한다. 자율주행 선택이 현실화되면 100가구 당 175대에서 60대로 줄어들 것이란 전망이다.

자율주행시대로의 최대 변수는 사회적 인식과 법규·해킹 위험 등 보다 복잡한 인문사회적 요소가 될는지도 모른다. 해킹에 대비해 차량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실제로 테슬라의 모델 S는 외부 해킹으로 주행 중 시동이 꺼지는 일을 겪었다. 자동차 기술혁명에 따라 일자리는 물론 보험·금융·규제·연료·수리·주차 등 자동차 관련 모든 산업과 서비스에 엄청난 충격이 예상된다. 도로 설계와 인프라 등 모든 부문이 영향권에 들 것이다.

기술혁명은 단순히 기술혁신의 성공 여부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문화적 인프라 구축 여부에 달려 있다. 정책에서 큰 그림을 보되 디테일을 챙기는 섬세함이 필요하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그린코리아21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