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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아이 혈흔 휠가드가 단서, 은색 그랜저 500대 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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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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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부산시 을숙도공원 주변 도로에서 7세 어린이를 치고 도주 중인 용의차량(사진 왼쪽 빨간 원).

지난 18일 오후 9시14분쯤 부산 강서구의 한 아파트 주차장 입구에서 사하경찰서 뺑소니 수사전담반 직원들이 귀가 중이던 김모(43)씨를 검거했다. 김씨는 지난 9일 부산 사하구 을숙도공원 주변 도로에서 7세 어린이를 숨지게 한 뺑소니 교통사고의 용의자였다. 김씨 검거는 경찰 전담반이 추석 연휴를 반납하고 집요하게 추적해 사건 발생 9일 만에 거둔 쾌거였다.

경찰, 일일이 집 방문해 차량 조사
차량분석시스템 활용 30대로 압축
용의자 차 밑에서 머리카락 나와

사고는 지난 9일 오후 8시쯤 을숙도공원 앞 하단에서 명지동 방향 편도 4차로에서 일어났다. 피해 어린이 A군(7)은 부모가 맞벌이를 해 평소 부모가 귀가할 때까지 돌보미 할머니가 돌봐줬다. 평소에는 오후 7시쯤 퇴근하던 A군 부모가 이날은 “좀 늦을 것 같다”며 돌보미 할머니에게 연락했다. 마침 할머니를 기다리던 할머니 남편이 “그럼 근처에서 바람이나 쐬자”며 A군과 함께 공원을 찾았다. 경찰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A군이 도로변으로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고는 4차로에 아이가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일부 시민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A군에게 다가가는 순간 발생했다. 이 사고로 A군은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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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에서 결정적인 단서 역할을 한 이 차량의 부품 휠가드. [사진 부산사하경찰서]

경찰은 신고자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과 사고 현장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확보했다. 그러나 화질이 좋지 않아 차량 번호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추석 연휴가 시작되면서 다른 정부 기관이나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휴무에 들어가 CCTV 영상 제공 등의 협조를 곧바로 얻을 수 없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4일 만인 지난 13일 강력팀 형사들과 교통사고 전문 조사관 등 31명으로 수사전담반을 꾸렸다.

일반적으로 뺑소니 사건은 시간이 지체될수록 용의차량에서 사고 흔적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찰은 촌각을 다퉈야 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같은 날 신속히 공개 수사로 전환했다. 하지만 결정적 추가 제보가 없어 수사는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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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단서는 사고 현장에 떨어져 있던 자동차 부품 휠가드뿐이었다. 타이어 주변에 흙 등 이물질이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부품인데, 사고 충격으로 용의차량의 운전석 쪽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긴급 감정을 맡긴 결과 휠가드에서 숨진 A군의 혈흔과 조직이 발견됐다. 자동차 부품업체를 통해 용의차량이 은색 2006년식 그랜저TG인 사실을 확인했다. 유일한 단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사건 해결에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경찰은 퇴근시간에 사고가 난 사실로 미뤄 용의자가 사고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를 토대로 인근 9개 지역에 등록된 동종 그랜저 차량 500여 대를 추적했다. 도난·수배 차량을 찾는 데 이용하는 차량 분석시스템을 통해 사고 당시 현장을 지나간 2555대의 차량 가운데 동종 그랜저 차량 30여 대를 압축해 조회했다.

전담수사반은 이들 차량의 소유주 집을 일일이 방문해 차량을 확인했다. 그러다 한 차량이 경찰 수사망에 걸렸다.

지난 13일 오전 5시쯤 사고 현장 주변에 동종 차량 한 대가 지나는 장면이 포착됐다. 경찰은 이 차량이 인근에서 출근했다 퇴근길에 사고를 냈던 용의차량으로 의심했다.

경찰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 차량의 운전석 쪽 휠가드가 부서져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현장에서 확보한 부품 조각과도 일치했다. 차량 하부에서 A군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도 발견했다. 하지만 붙잡힌 김씨는 “퇴근하던 중 (뭔가가 부딪혀) 차량이 덜컹거리긴 했는데 사람인 줄 몰랐다”고 경찰에서 발뺌했다. 김씨는 사고 이후에도 회사에 출퇴근을 정상적으로 했고 추석 연휴에는 고향에 다녀온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길이가 1m가량 되는 휠가드가 차량에서 떨어져 나갈 정도로 사고 충격이 컸을 텐데도 김씨가 차에서 내려 주변을 확인하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김주상 사하경찰서 교통조사계장은 “뺑소니 사고로 어린아이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고 간 비정한 어른을 반드시 검거하기 위해 교통조사계 모든 직원이 친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사건 수사에 집중했다”며 “김씨를 상대로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해 조만간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도로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고 차량 블랙박스도 널리 보급돼 있는 데다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한 시민 고발이 활발하기 때문에 뺑소니 도주범은 결국 잡힌다”고 말했다.

부산=강승우 기자 kang.seung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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