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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구종서<본사 논설위원>
요즘 주변국가들의 돼나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촌이 땅 살 때」의 기분이다.
20년간 군림해온 독재자가 민권의 궐기로 축출됐을 때 우리는 필리핀의 장래를 걱정했었다.
정치경험이나 의사가 전혀 없던 여성이 거목 같은 「마르코스」의 자리를 제대로 메울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우리의 염려는 기우였다.
권위와는 거리가 먼 「코라손·아키노」는 지금 국민으로부터의 진정한 인기와 그의 사심 없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정변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주화 작업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가고 있다.
「마르코스」독재의 받침돌이었던 군부는 야당에서 여당이 된 지금의 정부를 정성스레 떠받치고 있다.
권력자 개인에 충성하던 군이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의 군대」로 자세를 바꾸자 학생·지식인·노동자들도 다시 군을 사랑하고 신뢰하게 됐다.
「마르코스」독재로 황폐됐던 필리핀은 이제 국민적 단결을 회복하고 새로운 민족주의 민주국가를 건설해 나가고 있다.
일본은 이번 총선거에서 한층 성숙된 민주주의를 과시했다. 극우와 극좌, 빈자와 부자가 어우러져 치열한 한판 게임을 벌였으나 뒤는 깨끗하고 조용하다.
새로 영향력이 커진 「나카소네」수상 겸 자민당 총재는 집권이 연장될 모양이다. 본인이 고집해서가 아니라 상황의 진전과 주변의 권고에 의해서다.
정치가 이처럼 밝고 활기찬 것은 자유롭고 개방된 무대에서 펼쳐진 페어플레이의 당연한 결과다.
경기규칙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심판이 공정하고 선수들이 반칙 없이 싸워 이겼을 때 관객은 누구나 박수를 치고 그 결과에 승복하게 마련이다. 거기서의 승자는 모든 성과를 독식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분명히 국민이다. 모든 정치가 국민의 의사대로 결정되고 추진된다. 필리핀과 일본에선 이런 주객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다.
그러면 지금 우리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혹시라도 주인이어야 할 국민이 종의 입장에 밀려나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본다.
공권력은 가장 엄격해야할 도덕적 책임주체다. 그럼에도 종 된 자가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인 된 국민을, 그것도 보호받아야할 어리고 약한 여학생을 잘못 다뤄 지금 많은 사람이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
아직도 정치의 근본이 확립돼있지 않다는 증거인가.
남들의 정치는 복지증진을 위한 정책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기본인권문제와 정통성시비, 체제분쟁에서 맴돌고 있다.
직선제와 간선제, 대통령제와 내각제 따위는 이미 공화정건국초기에 해결됐어야할 문제다.
그래서 지금쯤은 외국과의 발전경쟁, 국민권익의 향상에 국가적 에너지를 총동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외국의 정치인들이 국민을 상전으로 받들고 잘 보이기 인기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이 나라에선 국민이 소외된 채 권위과시 경쟁이 계속돼왔다.
그만큼 우리 정치는 뒤떨어져있다.
지금 이 나라 주인의 의사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선거방식·권력구조·선거구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정책에 대해서도 그들의 뜻은 자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자기네의 궁색한 사정 때문에 자명한 국민의사를 외면하고 자기와 자파의 이익만 쫓느라 엉뚱하게 딴 길만 헤매고 있다.
이제 부질없는 분쟁은 빨리 끝내야 한다. 본질인 국민의사에 순명하는 일만 남았다.
이 같은 국민의 뜻이 실현될 수 있다면 제도자체는 내각제건 대통령제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젠 우리 정치도 체제의 싸움에서 정책경쟁으로, 권위과시에서 봉사경쟁으로 전환해야할 때다. 관리자들은 주인 석을 떠나고 국민이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이번 개헌은 그런 계기를 마련하는 마지막 작업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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