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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 검은 물체 “때려” “탕~” …150㎏ 멧돼지 후다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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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달 31일 오후 8시30분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적성파출소. 파주시 ‘야생동물 피해방지단’ 단원 2명이 들어섰다. 엽사 한 명이 동료를 신원보증인으로 세운 뒤 엽총 한 정을 반출했다. 엽사는 동료 2명과 사륜구동 차량을 타고 인근 적성면 구읍리 감악산 기슭 농로에 도착했다. 최근 멧돼지 출몰 신고가 잇따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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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9시쯤 경기도 파주시 감악산 기슭에서 파주시 ‘야생동물 피해방지단’ 단원 이종수씨가 차량으로 멧돼지를 추적하고 있다. [파주=전익진 기자, 우상조 기자]

곧바로 ‘멧돼지 포획작전’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미등만 켠 채 천천히 차를 몰았다. 엽사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차량 안에서 엽총을 꺾어둔 채 탄환 1발을 손에 들고 사방을 주시했다. 나머지 단원 2명은 서치라이트를 이리저리 비추며 멧돼지를 수색했다. 이들은 차 안에서 말 대신 손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야생동물 피해방지단, 한밤 포획작전
파주 감악산 출동 1시간 만에 마주쳐
총 쐈지만 빗나가 개울 건너 도주
3시간 수색에 두번 목격, 포획 실패

이 일대 논둑과 밭둑에는 멧돼지 등 야생동물 피해를 막기 위한 검은색 그물망이 1m 정도 높이로 쳐져 있었다. 인삼밭 가장자리에서 얕은 물웅덩이를 발견하자 차에서 내려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집중 수색했다. 단원 이종수(65)씨는 “축축한 진흙과 발자국으로 볼 때 조금 전까지 멧돼지가 목욕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주변 논 옆에는 전기울타리가 설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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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와 함께 멧돼지 수색에 나선 야생동물피해방지단 이용찬(오른쪽)·김종욱 단원. [파주=전익진 기자, 우상조 기자]

오후 9시쯤 전기울타리가 쳐진 논을 지나다 20여m 떨어진 논 가장자리로 검은 물체 하나가 “휙∼” 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서치라이트에 비쳤다. 즉시 차를 멈추고 차 안에서 단원 2명이 서치라이트 2대를 이곳저곳 비추기 시작했다. 금세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어 큰 놈이야”라고 조용히 속삭이며 엽사와 단원 2명은 안타까워했다. 이들은 “일단 내려보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고는 어디서 갑자기 달려들지도 모르는 멧돼지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엽사는 탄환을 장전한 엽총을 논 방향으로 겨눈 채 몸을 낮추고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이 3분가량 흘렀다. 이들은 “이 주변 어디엔가 멧돼지가 머물고 있을 것”이라며 “오늘 밤 아니면 내일 밤이면 반드시 멧돼지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며 다시 차에 탔다.

오후 9시30분쯤 장현리 옥수수밭을 지나다 마침내 멧돼지와 맞닥뜨렸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던 단원 1명이 20m 옆에 서 있는 멧돼지를 발견했다. 그는 “똑똑” 하며 작은 소리로 차문을 두드리며, 긴박하게 손짓했다. 이어 “때려”라고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이 말은 ‘발사’란 뜻의 은어다.

엽사는 순식간에 탄환 한 발을 장전해 멧돼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즉시 단원들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10여 분간 주변을 뒤졌지만 멧돼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탄환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발자국을 추적해 보니 멧돼지가 돼지풀밭을 지나 개울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250근(150㎏)이나 되는 큰 놈이었다”며 아쉬워했다. 이들은 이날 밤 약 3시간 동안 수색작업해 곳곳에서 멧돼지 흔적을 발견했으나 포획에는 실패했다.

기자는 이날 전국 농경지를 파헤치고 민간인에게 인명 피해까지 입히는 멧돼지를 잡는 야생동물 피해방지단과 함께 멧돼지 포획 현장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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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설치된 포획틀에 잡힌 멧돼지. 철망 안에는 고구마 등 멧돼지 유인용 먹이가 들어 있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멧돼지 포획활동은 낮에도 이뤄진다. 엽사 김종욱(47)씨는 “요즘 가을 수확철을 맞아 농경지의 멧돼지 피해가 극심하다”면서 “농경지 주변의 우거진 칡넝쿨 때문에 대낮에도 포획작업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멧돼지는 ‘산저(山猪)’로 불린다. 이름처럼 요즘 대한민국 산야에서 저돌(猪突)적으로 날뛰고 있다. 과거에는 호랑이가 민가를 덮쳐 소를 잡아먹는 호환(虎患)이 심각했다. 요즘엔 전국이 ‘산저환(山猪患)’으로 민심이 흉흉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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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북한산국립공원에서 멧돼지 13마리가 포획됐다.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요즘 멧돼지는 통제불능이라고 할 정도로 급속도로 번식하고 있다. 야생동물 포획 기준이 엄격해진 데다 호랑이 등 천적마저 사라져 멧돼지가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멧돼지 서식밀도는 2013년 100㏊당 4.2마리에서 지난해엔 5마리로 늘었다.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 1500㎡ 밭에서 땅콩·고구마·옥수수를 재배하는 농민 김동국(75)씨는 수확철을 앞둔 요즘 일손을 놓고 있다. 최근 40여 일간 밭 전체가 멧돼지 습격을 받아서다. 김씨는 “그물망을 쳐 놓아도 밤낮없이 뚫고 들어와 농작물을 먹고, 밭을 파헤치는 바람에 수확할 게 없다”며 “8년간 농사짓는 동안 매년 피해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특히 밤에는 멧돼지가 무서워 가급적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파주시 적성면 어유지리에서 옥수수를 기르는 김철근(69)씨는 “지난달 초 곰 덩치 정도의 멧돼지 한 마리가 옥수수 밭을 몽땅 파헤쳐 버리는 피해를 당했다”며 “밭 옆에서 기르는 진돗개 7마리가 멧돼지를 만나자 벌벌 떨어 멧돼지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폭죽을 사다가 밤이면 옥수수밭에서 터뜨리며 멧돼지 퇴치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환경부 집계에 따르면 멧돼지로 인한 전국의 농작물 피해액은 2014년 42억원, 지난해는 47억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 지자체가 엽사로 구성된 야생동물 피해방지단을 운영해 적잖은 성과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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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의 경우 20명의 엽사로 피해방지단을 꾸려 퇴치 활동을 해오고 있다. 지난해 멧돼지 83마리를 포함해 유해조수 368마리를 포획했다. 단원 20명 가운데 17명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나머지 3명은 농부다. 대부분 낮 시간 짬을 낸다. 이들은 주야간으로 나눠 활동 중이다.

인근 연천 지역에서는 멧돼지 피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대거 엽총을 들고 나섰다. 연천에서 10년째 피해방지단원으로 활동 중인 왕영남(59)씨는 농민이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이면 엽총을 든다. 그는 10만㎡의 논농사를 짓는데 10년 전 1500만원가량 피해를 보면서 아예 수렵면허를 받아 포획활동에 뛰어들었다. 왕씨는 “연천의 단원 33명 중 20명이 농민”이라며 “피해를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스스로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연천에서 활동 중인 김상석(58·자영업)씨는 “멧돼지 신고전화를 받으면 밤낮 없이 출동해야 하는 고충이 크지만 지역 농민과 주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원들은 “멧돼지 포획이 나름 묘미가 있다”고 귀띔했다. 좋아하는 사냥을 할 수 있는 데다 멧돼지 고기를 맛보는 것도 덤이라고 한다. 포획한 멧돼지를 판매할 수는 없지만 ‘자가(自家) 소비’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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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생생물보호관리협회 이용찬(57) 파주시 지회장은 “파주·연천 일대의 민통선 지역과 군부대 사격장 주변에서 엽총을 사용하는 야생동물 포획이 금지돼 있어 개체 수 조절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와 지자체가 다양한 활동 지원책을 마련해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멧돼지의 도심 출몰도 계속되고 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지난해 멧돼지가 155회나 도심에 출몰했다. 김남호 국립공원관리공단 생태복원 담당은 “북한산 국립공원에 멧돼지 120여 마리가 서식 중인 것으로 추산한다”며 “포획틀과 포획장을 이용해 올해 13마리를 포획했다”고 소개했다.

파주·연천=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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